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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자식이란 가면을 벗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김현주의 즐거운 갱년기(55)

요즘 들어 특히 친구들과 많이 하는 이야기 중 하나가 부모의 근황이다. 30, 40대에는 시부모, 친정 부모로 나누어 아쉬운 점, 고마운 점 등을 수다 떠는 정도였다면, 50대가 된 지금은 부모의 건강에 대해 고민을 털어놓고 걱정을 나눈다. 부모의 연세가 80세 전후가 되니 어떤 상황도 한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닌 누구에게라도 닥칠 수 있는 선례가 된다. 엄마의 검진을 위해 몇 주째 주말마다 병원에 모시고 다녀오는데, 특별한 결과가 안 나오는 데도 계속 몸이 안 좋다고 한다.

요양병원에 입원한 아빠가 늘 마음에 걸리지만, 지금으로서는 더 나빠지지 않는 것에 감사할 수밖에 없다. 고관절 수술을 받은 엄마가 통 입맛이 없어 식사를 못 한다. 치매 판정을 이후 상태가 점점 나빠지는 엄마를 보면서 자책감이 든다. 이렇게 자식의 입장에서 나이 든 부모가 맞닥뜨린 새로운 상황에 당황해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이전부터 걷는 걸 힘들어 하던 엄마는 요즘 들어 외출을 더 안 하려고 한다. 코로나로 밖에 나가는 걸 삼갔던 1년이 지난 지금 걸음새가 더 나빠진 건 물론이다. 얼마 안 걸어도 무릎이 아파 쉬어야 하고, 숨을 몰아쉰다. 당신도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올들어 동네 한의원에 침 치료를 받으러 다니는데, 그나마 그렇게라도 왔다 갔다 움직이는 기회가 되니 조금씩 좋아지리라 믿어 본다.

몇 년 전 뇌출혈로 병원에 입원한 아빠. 다행히 큰 탈 없이 퇴원했지만 이후 기억력이 확실히 나빠졌다. 그래서 1년 전부터는 인지 능력 개선을 위한 약을 복용하고 있다. 걷는 것을 좋아하고, 등산도 즐겨 코로나 확산 이전에는 친구들과 주말마다 산에 오르곤 했는데, 지금은 조심스레 동네 한 바퀴 돌고 들어오는 게 전부다.

엄마의 검진을 위해 몇 주째 주말마다 병원에 모시고 다녀오는데, 특별한 결과가 안 나오는 데도 계속 몸이 안 좋다고 한다. [사진 Nani Chavez on unsplash]

엄마의 검진을 위해 몇 주째 주말마다 병원에 모시고 다녀오는데, 특별한 결과가 안 나오는 데도 계속 몸이 안 좋다고 한다. [사진 Nani Chavez on unsplash]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중에는 회사일, 주말에는 밀린 집안일을 하느라 부모님을 자주 챙기지 못했지만 퇴사한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확실히 머릿속에 빈자리가 생겨서인지 주변 사람들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된다. 그중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부모님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엄마가 지금의 내 나이 때 어떠셨지?’란 질문 하나가 떠올랐고, 50대의 엄마와 20대였던 나의 모습을 끄집어내게 되었는데, 그 당시 난 엄마가 ‘갱년기에 들어선 중년 여성’이라는 걸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됐다. 엄마도 그런 내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 분명 몸과 마음에 변화가 있었을 텐데, 무심한 딸이었다는 생각에 죄송스러웠다.

아빠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안에 대해 아빠와 입장차이가 생기면, 어릴 적 하던 대로 목소리를 높이곤 했다. ‘두 분이 이제 나이가 드셨구나’를 느낀 70대 중반까지도 말이다. 그 전까지 나에게 두 분은 내가 의지해왔던 어릴 적 엄마였고, 아빠였다. 그러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얼마 전까지만 체력이 있으셨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으시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아빠 뒤로 걷다가 갑자기 아빠의 나이를 떠올렸다. 아, 올해 팔순이구나. [사진 김현주]

'얼마 전까지만 체력이 있으셨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으시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아빠 뒤로 걷다가 갑자기 아빠의 나이를 떠올렸다. 아, 올해 팔순이구나. [사진 김현주]

지금부터라도 더 자주 뵙고, 함께하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싶다. 그런 마음으로 지난 일요일 아빠와 함께 서울 둘레길을 걸었다. 주말마다 코스를 정해 걷고 있는 내 여정에 아빠를 초대한 것이다. 부모님 댁 가까운 코스 중 걷기 수월한 북한산 둘레의 구름 정원길로 정했다. 딸과 사위와 함께 걸어 보는 건 처음인 아빠는 내색은 안 했지만 무척 즐거워했다. 진작에 이런 시간을 가졌어야 했는데…. 가벼운 발걸음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으며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 이야기를 나눴다. 강둑을 따라 걷는 초반에는 괜찮았는데 얕지만 산길이 나오자 힘들어 보이셨다. 등산을 즐긴 아빠라 이 정도로 지칠지 몰랐는데 말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편보다 앞서 걸을 정도로 체력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아빠 뒤로 걷다가 갑자기 아빠의 나이를 떠올렸다. 아, 올해 팔순이구나! 지치는 게 당연하지. “아빠, 이제 집으로 내려갈까 봐요. 충분히 걸은 것 같아요.” “아니, 나는 괜찮은데, 너희 걷고 싶은 만큼 더 걸어.” 얼굴에는 땀이 맺혀 있고, 분명 힘들어 보였지만 웃으시며 말씀하신다. 그래, 아빠도 내가 어릴 적 아빠가 되고 싶으시구나.

일본의 심리학자 기시미 이치로의 책 『나이든 부모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인플루엔샬)에는 ‘부모와 자식이라는 가면을 벗어라’라는 챕터가 있다. 자식이란 가면을 쓰지 않으면 인간으로서 부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 있으며, 그렇게만 할 수 있으면 부모의 이야기를 더 재미있고 의미 있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게 어려우면 친구의 가면이라도 써보라면서 말이다. 부모·자식 관계에서 부모 혹은 자식이, 아니 가능하면 양쪽 모두가 친구의 가면을 쓴다면 이야기를 나누는 법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나이 든 부모와 함께 사는 문제가 사회적 화두로 떠오른 이때 ‘부모와 자식이라는 가면을 벗고 인간 대 인간으로 마주하라’는 저자의 통찰을 높이 산다”는 이어령 교수의 추천 글에 동감하며 부모님의 현재를 이해해 보겠다고 마음먹어 본다. 중년 부모님의 모습은 못 보고 지나쳤지만, 노년의 부모님과는 함께 해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전 코스모폴리탄·우먼센스 편집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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