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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퇴사 후 가장 즐거운 새벽부터 아침까지 3시간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김현주의 즐거운 갱년기(54)

지난해 연말 퇴사한 이후 어찌 됐건 오랜만에 제대로 쉬고 있다. 물론 머릿속 한쪽으로는 어떻게 새로운 일을 만들어갈지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지만, 그런데도 온전히 충만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 지켜야 하는 루틴이 없는 생활이기에 24시간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읽고 싶을 때 읽을 수 있다는 게 이 정도의 자유로움을 줄 수 있다니. 가장 달라진 건 조금 일찍 잠자리에 들고 아주 일찍 일어난다는 것이다. 보통 새벽 5시 즈음 눈이 떠지는데 어떤 날은 그 시간이 한 시간 정도 당겨지기도 한다. 출근해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하루가 피곤하겠다는 생각에 조금 더 누워 보려 하겠지만, 그런 부담이 없으니 바로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한다. 고요한 새벽 사부작사부작 혼자 움직이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차를 우리고, 매트를 꺼내 그 위에 앉은 후 어두운 창밖으로 시선을 둔다. 유튜브를 TV와 연결해 즐겨 찾는 요가 채널을 틀어 놓는다. 40여분 들이마시고 내쉬는 호흡에 집중하며 깊게 스트레칭한다. [사진 Cassie Bocca on unsplash]

차를 우리고, 매트를 꺼내 그 위에 앉은 후 어두운 창밖으로 시선을 둔다. 유튜브를 TV와 연결해 즐겨 찾는 요가 채널을 틀어 놓는다. 40여분 들이마시고 내쉬는 호흡에 집중하며 깊게 스트레칭한다. [사진 Cassie Bocca on unsplash]

따뜻한 차를 우리고, 매트를 꺼내 그 위에 앉은 후 어두운 창밖으로 시선을 둔다. 유튜브를 TV와 연결해 즐겨 찾는 요가 채널을 틀어 놓는다. 40여분 들이마시고 내쉬는 호흡에 집중하며 깊게 스트레칭한다. 확실히 요즘은 회사에 다닐 때보다 몸을 더 많이 움직이고 있는데 마음의 균형을 찾는 데 도움이 된다. 요가 수련을 마치면 온몸에 기분 좋은 땀이 돈다.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시간을 들여 정성스럽게 세수를 해 본다. 이 역시 회사에 출근할 때는 할 수 없었던 일이다. 출근 중 운전하는 차 안에서 간단한 메이크업을 끝낼 정도로 바쁜 아침 시간이었으니 말이다. 과일 한 접시를 준비한 후 오물오물 삼키며 배달된 신문의 1면부터 32면까지 쭉 훑는다. 어젯밤 읽다가 만 책의 페이지를 펼치기도 한다. 그즈음이면 주변이 서서히 밝아지는데, 이때쯤부터 남편과 딸 아이의 아침상을 준비한다. 물론 두 사람 모두 아직 일어나기 전이다. 새벽부터 아침까지 나 혼자 맞는 이 3시간이 퇴사 후 얻은 가장 즐거운 여유다.

두 번째 즐거움은 더 많이 읽게 되었다는 것이다. 소설, 에세이, 만화, 경제서 등 장르를 불문하고 읽어 보겠다고 찜해 놓았던 책을 한 권씩 만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책도 인연이다. 수많은 추천사 중 어떤 글귀 한 줄이 마음을 흔들기도 하고, 빽빽하게 꽂혀 있는 서가에서 제목이 눈에 확 들어오기도 하며, 갑자기 한 작가가 머릿속에 떠오르기도 하고, 특정 시점에 누군가 나에게 권하기도 한다.

회사를 그만둔다는 말을 듣고 만난 친구가 쥐여 준 김형경 작가의 『좋은 이별』.

회사를 그만둔다는 말을 듣고 만난 친구가 쥐여 준 김형경 작가의 『좋은 이별』.

어떤 경로로 만나게 되든 간에 내 앞에 놓인 책은 지금 나에게 필요했던 책이다. 최근 지인의 권유로 읽게 되었던 두 권의 책처럼 말이다. 회사를 그만둔다는 말을 듣고 만난 친구가 쥐여 준 김형경 작가의 『좋은 이별』. “지금의 너를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될 거야”라며 권한 친구의 마음에 고마워하며 펼친 책이다. 『사람풍경』과 『천개의 공감』을 오래전에 읽었던 터라 작가의 에세이가 주는 치유의 힘을 익히 알고 있었다. ‘애도심리 에세이’란 부제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책은 지금의 내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지는 이전의 내가 어떤 이별을 했는지와 연관이 있다는 내용이다. 이별의 대상은 가족, 연인, 상황과 시간 등 다양할 수 있다. 작가는 스스로 정신분석을 받은 후 체득한 내용을 문학 작품 속 인물과 유명인, 주변 지인의 사례를 통해 흥미롭게 설명한다. 제대로 애도하지 못한 슬픔의 감정이 인생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꼼꼼히 읽다 보니 나의 이별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자연스럽게 돌아보게 되었다. 하긴 지금도 26년의 에디터 생활을 그만둔 터이니, 좋은 이별과 애도의 과정이 필요하겠다.

막내 기자가 선물로 전한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

막내 기자가 선물로 전한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

또 한 권은 우먼센스의 막내 기자가 선물로 전한 책인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다. 출근하는 마지막 날이었는데 정성스럽게 쓴 카드와 함께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요즘 잘나간다는 작가의 그래서 어쩌면 진부할 수 있는 책을 선물합니다. 이 책을 읽고 난 뒤로 저보다 많은 경험을 하며 세상을 살아온 어른들에 대한 존경심이 커졌습니다. 띠지에 적힌 문장을 빌려 쓰자면 ‘20세기를 씩씩하게, 21세기를 멋지게 지내고 계시는’ 편집장님께 드리는 막내의 사랑입니다.”

후배가 전한 카드의 마지막 문구에 울컥 마음이 뜨거워졌다. 한국전쟁으로 가족을 잃고 새로운 삶을 찾아 하와이로 떠난 심시선은 천신만고의 시간을 거쳐 한국에 돌아와 작가가 된다. 소설은 그런 그녀가 두 번의 결혼으로 만들어낸 가족의 이야기를 담는다. 엄마와 할머니의 영향을 받고 자란 가족은 심시선의 10주기를 추모하기 위해 특별한 제사를 계획한다. 읽는 내내 미소를 띨 정도로 즐거운 독서였다. 여성 중심의 3대가 펼치는 서사는 응원할 수밖에 없었고, 소설의 매 챕터를 시작하는 심시선의 글과 활약상은 고개를 주억거릴 정도로 통쾌했다. 순종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며 체득한 삶의 지혜를 거침없이 펼쳐 놓는 어른! ‘나도 이런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 혼잣말이 절로 나왔다.

나를 귀하게 여기고, 나를 돌아보며, 다시 나를 채워가는 요즘의 이 시간. 이 소중한 시간을 가능한 한 마음껏 즐겨볼 참이다. 후배가 전한 카드 앞에 적혀있던 문구처럼 말이다. 카르페 디엠(지금에 충실하라)!

전 코스모폴리탄·우먼센스 편집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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