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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양성희의 시시각각

수신료의 조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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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KBS 이사회가 현행 월 2500원인 수신료를 3840원으로 인상하는 안을 상정했다. 1980년 이후 41년째 동결된 수신료를 ‘현실화’해 연간 1000억원대 적자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취지다. 인상안은 방통위를 거쳐 국회 승인을 받아야 한다. 2003년 이후 네 번째 인상 추진이다.

방송사 생존 아닌 시청자 입장서 #수신료 인상 필요성 설득해야 #수신료위원회 설치 등 필요해

미디어, 심지어 공영방송까지 과잉 정치화된 한국 사회에서 수신료 이슈는 방송이 아니라 정치 이슈로 받아들여진다. 수신료 인상에 대해 여야의 입장이 엇갈린다. 여당 때는 수신료 인상을 찬성하다가도 야당이 되면 돌변한다. 시청자들도 수신료 인상의 선행조건으로 ‘정치적 공정성’을 요구한다. 여기서도 정치적 입장이 중요하다. 자신과 정치적 입장이 같으면 공정하다고, 다르면 불공정하다고 여긴다. 한국의 공영방송이 정치적으로 독립적이기보다 집권세력의 정치적 후견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셈이다. 여권은 이미 수신료 인상 찬성 의사를 밝혔다. 야권은 반대다. 고비용 구조, 경영혁신 부족, 정치적 편파성을 맹공한다.

정치적 공정성 말고는 어떤가. 상업방송에선 볼 수 없는 고품질 콘텐트와 공공 서비스, 다양성, 소수자 보호, 지역문화 활성화, 사회 통합 등을 공영방송의 덕목이라고 한다면 KBS는 이를 얼마나 충실하게 이행했는가. “완전 막장은 없지만 그렇다고 KBS표 드라마도 부족.” “좋은 다큐는 EBS에도 많고, 넷플릭스에는 더 많다.” “주 타깃인 고령 시청층이 좋아하는 트로트 열풍은 종편이 선도한다.” “9시 메인뉴스 여성 앵커 단독 진행은 신선하지만, BBC는 방송 출연진과 주요 역할에서 여성 비율을 50%까지 늘리겠다고 약속했다.” 내 주변에서만 들리는 소리는 아닐 것 같다. “집에 아예 TV가 없는데 전기요금 통합징수는 부당하다.” “90% 넘는 가구가 유료방송으로 KBS를 보니 이중 부담이다.” “무보직 억대 연봉자가 30%를 넘는 꿈의 직장.” 이들 또한 오래된 레퍼토리다.

이준웅 서울대 교수에 따르면 한국의 공영방송은 “좋은 채널은 우선 사용하고 (수신료 징수로) 재원도 일부 보장받고 있지만, 방송법에 반대급부인 의무조항은 명료한 규정이 없다.” 수신료를 거둬 쓰는 KBS가 직접 액수를 산정·결정하는 것도 문제다. BBC나 NHK는 방송사의 안을 의회 등에서 조율해 결정한다. 독일은 ‘수신료 산정위원회(KEF)’라는 독립기구에서 수신료 산정·징수·배분 등을 맡는다. “정부가 수신료 인상을 공영방송 길들이기 방편으로 사용할 수 없게 하고, 공영방송의 임의적인 수신료 인상 주장과 방만 운영을 막는 제도적 장치”(박주연 외대 교수)다.

수신료의 투명한 집행을 위한 회계분리 목소리도 높은데 KBS와 EBS는 부정적이다. EBS는 수신료산정위원회를 통한 정당한 배분을 원하지만, KBS는 이조차 반대다. KBS가 받아서 EBS에 적당히 떼어주면 된다고 생각한다. 현재 EBS는 수신료의 3%(70원)를 배당받는데, 이는 한전의 통합징수 위탁 수수료(6%)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번 인상안에는 5%(190원)로 올렸으나 EBS는 700원을 요구한다.

핵심은 수신료란 비용의 본질이다. 정준희 한양대 교수에 따르면 “수신료는 단순한 공적 재원이 아니라 공영방송과 시청자 사이에서 맺어지는 새로운 사회계약의 중요한 표현”이다. 단순히 KBS의 생존 보장 차원을 넘어 상업방송에서 훼손받는 공영적 가치를 지키려는 시청자가 공공 서비스에 지불하는 돈이다.

원칙적으로 수신료 인상에 찬성한다. 미디어 환경 변화로 유수한 해외 공영방송들도 휘청한다지만, 공공 미디어의 가치는 여전하다고 믿는다. 단, 이 정부의 대선 공약이던  ‘수신료위원회’ 설치와 KBS 수신료 회계분리가 선행돼야 한다. 그저 시뮬레이션을 돌려 이 정도면 적자를 면하겠다며 정치적 지원을 기대하는 셈법으론 곤란하다. 투명하게 관리되고, 무엇보다 정치적 독립성과 공적 책무를 다할 때 주어지는 돈. 그게 수신료의 조건이다.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