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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w] “이적 행위” “색깔론” 프레임 씌우기 몰두하는 여야…정치인들 관심은 진실이 아니라 득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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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코끼리는 생각하지마』에서 조지 레이코프는 “생각하지 말래도 코끼리를 자꾸 떠올린다”고 했다. 어떤 사안에 프레임을 씌우면 실제 내용과 상관없이 그 틀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뜻이다. 대북 원전 추진 의혹을 ‘이적 행위’로 표현한 야당이나, 이를 ‘색깔론’으로 맞받은 여당 모두 철저한 프레임 전략을 따르고 있다.

더 큰 프레임으로 맞받아쳐 #지지자들 결집 시키는 효과

지난주 청와대와 여당은 쉴 새 없이 터져나오는 대북 원전 추진 의혹으로 갈팡질팡했다. 야당은 김종인 비대위원장의 ‘이적 행위’ 표현으로 공격 수위를 높였다.

그러나 지난달 31일 문재인 대통령의 ‘마타도어’ 발언이 알려진 후 여당의 반격이 일사불란해졌다. 문 대통령은 1일에도 “구시대 유물” 같은 강경 표현을 이어갔다. 그러자 여당도 “색깔론 되풀이”(이낙연 대표), “망국적 매카시즘”(김태년 원내대표) 등 과격 발언을 내놨다.

김중백 경희대 사회학과 교수는 “청와대가 ‘이적 행위가 아니다’고 해명하는 순간 ‘이적’이라는 프레임에 갇힌다”며 “프레임에 휘말리지 않는 방법은 프레임 자체를 깨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야당이 쳐놓은 ‘이적 행위’라는 프레임을 깨기 위해 ‘색깔론’과 ‘매카시즘’ 같은 더 큰 프레임으로 반격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한번 빠진 프레임은 사실의 진위 여부와 관계없이 정치적 폭발력을 갖는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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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이날 정치권과 지지층은 비생산적인 이념 논쟁에 빠졌다. “김영삼 정부의 경수로 지원사업도 이적 행위냐”(윤영찬·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의원)는 여당의 반격에 “특검으로 밝혀야 할 중대한 국기문란 사건”(김현철 김영삼민주센터 상임이사)이라며 공방이 오갔다. 주요 포털사이트와 언론사 댓글에서도 여야 지지자들 간에 설전이 벌어졌다.

프레임이 무서운 것은 언어가 갖는 ‘구성력’ 때문이다. 사소한 몸짓도 이름을 붙이면 ‘꽃’(김춘수)이 되듯, 말은 인식의 틀과 내용을 규정한다. 언어학자인 벤저민 리 워프는 “언어는 단순히 생각을 나타내는 복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생각을 형상화하고 실재하게 만든다”고 했다.

실제로 나치와 파시스트는 선동에 능하도록 짧고 선명하며 자극적인 표현을 사용했다. 유년기를 무솔리니 치하에서 보낸 움베르트 에코는 “파시스트는 비판적인 추론을 제한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빈약한 어휘와 초보적인 문법을 썼다”고 했다(『원형의 파시즘』).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새말(newspeak)’의 원리도 같다. ‘free’를 ‘자유’로 쓰지 않고 ‘sugar free(설탕이 없다)’와 같은 뜻으로만 사용하는 식이다. 오웰은 책의 해제에서 “어떤 말을 하고 싶어도 표현할 단어가 없으니 나중에는 생각 자체를 못 한다”고 지적했다. 그만큼 말과 글의 힘은 강하다.

언어의 정치적 이용을 극대화하는 프레임 전략은 정치인들의 단골 수법이다. 상대 정파를 빨갱이로 몰았던 과거의 보수정권처럼 문재인 정부는 야당을 적폐·토착왜구로 규정해 실재하지 않는 적을 만들고 지지자들을 세뇌시킨다.

민영 고려대 미디어학부 교수는 이적 행위나 매카시즘 같은 과격한 표현은 “정확한 사실 규명을 통해 본질에 다가가기보다 필요 이상의 갈등만 부추겨 지지자들의 결집을 이끌어내는 효과를 갖는다”고 말했다. 정치인들이 관심 있는 건 진실이 아니라 득실이다.

윤석만 사회에디터 s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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