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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 속에서 건져낸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감독인 저를 위한 말이었죠”

중앙일보

입력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에서 주인공 정은은 사무직으로 일하다 갑자기 하청업체 현장직으로 부당 파견된다. [사진 영화사 진진]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에서 주인공 정은은 사무직으로 일하다 갑자기 하청업체 현장직으로 부당 파견된다. [사진 영화사 진진]

“한국사회는 직장에서 갑자기 잘리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평생을 바쳐 일한 직업이 나의 존엄이자, 존재 가치인데 하루아침에 없어져버리면 앞이 안 보이죠. 다른 일을 찾으면 되겠지만, 당장 끔찍한 거예요.”

28일 개봉한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의 각본을 겸한 이태겸(50) 감독이 개봉 당일 전화 인터뷰로 들려준 얘기다.
7년간 몸 바친 회사에서 하루아침에 하청업체로 부당 파견된다면. 영화는 그런 처지의 정은(유다인)이 자신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 버텨낸 1년을 그린다. 사무직인 정은이 발령 난 하청업체 업무는 무려 송전탑 수리‧보수다. 그가 송전탑 높이만큼 까마득했던 현실에서 한 발 한 발 디뎌나가는 여정이 담담히 와 닿는다. 이 감독이 실제 어느 사무직 중년여성이 지방 현장직으로 부당 파견되는 치욕을 겪고도 버텨냈다는 내용의 신문기사를 보고 “남 일 같지 않아” 시나리오를 쓰게 됐다. 데뷔작 ‘소년 감독’(2008) 이후 준비하던 영화들이 줄줄이 무산돼 실직 상태가 되며 우울증까지 앓던 그에겐 다시 살기 위해 쓴 글이기도 했다.

28일 개봉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영화 제작 거듭 무산돼 우울증 앓던 감독 #부당 파견 근로자 실화 "남일 같지 않아" #주연 오정세 작년 전주국제영화제 배우상

우울증 속 어른대는 죽음 앞에 쓴 그 제목

13년만의 두 번째 연출작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를 28일 개봉한 이태겸 감독을 개봉당일 전화로 인터뷰했다. [사진 영화사진진]

13년만의 두 번째 연출작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를 28일 개봉한 이태겸 감독을 개봉당일 전화로 인터뷰했다. [사진 영화사진진]

“원래 유쾌한 성격인데 우울증에 걸려보니 무섭더군요. 삶에 의욕이 없고 죽음이 항상 눈앞에 있어요. 그냥 누워서 아무것도 못 하는 상태로 오랫동안 있었어요. 밥을 씹어도 모래알 씹는 것 같고 밥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죠. 이대로 있다간 큰일 나겠구나. 근데 오뚝이처럼 확 일어나면 자칫 다시는 못 일어날 것 같고. 절대 서둘러선 안 되겠다. 당장 영화가 안 돼도 어떻게든 이 글(시나리오)을 써보자, 마음을 추슬렀죠.”
자료 조사를 거쳐 2017년 한 달 만에 초고를 쓰고 지금의 제목이 떠올랐다.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저한테 하는 말이기도 했죠. 감독으로서 제 역할을 못 하는 이 암흑기에 나는 나를 뭐라고 생각해야 할까. 아, 나를 인정하고 긍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겠구나, 싶었죠.”

평소 멀리서 지나쳐온 송전탑은 바로 아래 서면 그 육중하고 아찔한 실체를 드러낸다. 자칫 부주의하면 감전사할 수 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정은은 기본 교육을 받고 퇴근 후 매일 연습하며 애쓰지만, 송전탑은 그를 깔보고 짓누르는 현실의 장애물 같기만 하다. 극 중 송전탑 장면들은 실제 안전장비를 갖추고 송전탑 관련 연습을 하는 전기교육원에서 주로 촬영했다.

왜 하필 송전탑이었나.  

“빛은 늘 우리 옆에 있지만 사실 굉장히 위험한 과정을 통해 도달한다. 송전탑은 규칙적인 구조지만 기하학적으로 복잡해서 쉽사리 해석하기 힘든 느낌도 있다. 상당히 올려다봐야 하는 높이는 현대사회에서 직업인으로서 우리의 삶 같기도 하다. 어쨌든 각자 안고 올라가야 하는, 그런 부분까지 카메라 시선으로 담으려 했다.”

실제 송전탑 현장 노동자를 취재했다고.

“산간지역 송전탑 현장을 쫓아다녔다. 철탑과 철탑 사이엔 길도 없어 여름에 수풀을 낫으로 헤치며 갔다. 현장 지휘장님이 말해준 직업병인 이명은 이번 영화음악에 ‘웅’하는 소리로 들어갔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두 번 죽는다. 한 번은 전기구이, 한 번은 낙하’란 말씀도 극 중 대사에 넣었다.”

사측 직원들은 단면적인 악당으로 그렸다.  

“리허설 직전까지 고민이 많았는데 현실에서 정은 같은 일을 당하는 당사자, 약자의 입장에서 관리자는 단면적으로 보이지 않을까, 했다. 영화로 옮겨왔을 때 관습상 캐릭터가 좀 그렇지 않나 볼 수 있지만, 현실은 더 잔인하다. 영화보다 더한 예도 많다.”

오정세 절정의 눈빛, 지금도 꺼내보죠 

영화에서 왼쪽부터 오정세가 연기한 '막내'와 주인공 정은(유다인)이 송전탑 사이의 자일에 매달려있다. [사진 영화사 진진]

영화에서 왼쪽부터 오정세가 연기한 '막내'와 주인공 정은(유다인)이 송전탑 사이의 자일에 매달려있다. [사진 영화사 진진]

영화 말미 화면을 스치는듯한 찰나로 포착되는 누군가의 죽음은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다가온다. 법의 사각지대 속에서 우리 사회가 곁눈질해온 비극을 이제 바로 마주하라는 무언의 선언 같다. “처음엔 소리도 넣으려 했어요. 엄청난 굉음이었을 텐데 결국 뺐죠. 관객에게 너무 세게 죽음을 들이미는 건 아닌 것 같아서. 최대한 간접적으로 그렸죠.”
이런 절제된 장면들이 오래도록 마음을 누르는 데는 배우들의 호연도 있다. 이 감독이 독립영화 ‘혜화, 동’(2010)의 섬세한 내면 연기를 보고 점찍은 유다인이 주연을 맡았다. 정은을 돕게 되는 하청업체 동료 ‘막내’는 드라마 ‘스토브리그’ ‘동백꽃 필 무렵’ 등에서 주목받은 오정세가 연기했다.

배우 오정세(사진)와 유다인은 이번 영화가 두 번째 호흡이다. 드라마 '아홉수 소년'(tvN)에서 노총각과 이혼한 싱글맘 역으로 로맨스 연기를 펼친 데 이어 이번에 7년만에 다시 뭉쳤다.[사진 영화사 진진]

배우 오정세(사진)와 유다인은 이번 영화가 두 번째 호흡이다. 드라마 '아홉수 소년'(tvN)에서 노총각과 이혼한 싱글맘 역으로 로맨스 연기를 펼친 데 이어 이번에 7년만에 다시 뭉쳤다.[사진 영화사 진진]

오정세는 지난해 이 영화가 초청된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배우상도 받았다. 그의 출연작을 대부분 봤다는 이 감독은 “오정세 배우는 악역도 잘하지만, 천성적인 착함이 있다고 느꼈다”면서 “이번 영화에선 어린 세 딸을 키우느라 착한데도 바빠서 그 착함을 드러낼 수 없는 역할”이라 설명했다. 정은과 싸우던 막내가 “우리한테 진짜 무서운 게 죽음보다 해고”라고 자기고백하는 순간과 함께, 막내가 정은을 괴롭히는 원청 관리관을 응시하는 눈빛을 “표현의 절정”으로 꼽았다. “인간적으로 이건 아니지 않느냐고 느끼지만 세 딸의 생계를 위해 더는 항변하지 못하는, 여러가지가 다 섞여 있는 눈빛. 어떻게 그런 눈빛을 할 수 있지, 싶어서 저는 지금도 그 장면을 종종 꺼내봐요.”

무역학과 나와 직장 사표 쓰고 영화 택했죠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에서 정은이 자일에 매달린 장면을 상하 뒤집어 포착한 장면. 그가 송전탑 작업을 하는 여러 장면은 그가 처한 현실을 빗댄 은유처럼 다가온다. [사진 영화사 진진]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에서 정은이 자일에 매달린 장면을 상하 뒤집어 포착한 장면. 그가 송전탑 작업을 하는 여러 장면은 그가 처한 현실을 빗댄 은유처럼 다가온다. [사진 영화사 진진]

이 감독 자신의 삶도 평탄하진 않았다. 경희대 무역학과 졸업 후 대한상공회의소에 취직했지만 대학 시절 탈춤반에서 마음껏 자신을 표현했던 감각을 잊을 수 없었다. 조직생활 속에서도 나를 잃지 않으려는 생각에 서른 되던 해 독립영화협회 영화워크숍에서 영화 공부를 시작했고 결국 입사 1년 반 만에 부모님 반대를 무릅쓰고 사표를 던졌다. 이후론 굴곡도 많았다.
그가 13년 만에 두 번째 영화를 개봉한 당일은 아침부터 폭설이 내렸다. “세상이 하야니까 오히려 저희 영화 주인공처럼 새로 태어나는 느낌도 드는데요?” 수화기 속 그의 웃음 너머 아기가 칭얼대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 영화 준비 중 결혼하고 아이를 얻었단다.
“첫 영화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현실과 맞닿아있으면서도 좀 대중적인 영화를 만들어야 하지 않나, 막연한 생각이었죠. 이젠 작품 하는 것 자체가 소중해요. 영화를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하고 인생의 동반자로 삼게 됐죠. 켄 로치, 다르덴 형제 감독을 좋아하는데 그런 분들과 비할 순 없겠지만, 저도 인간성의 회복에 관심이 많아요. 타인을 이해 못 하는 ‘섬’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게 아니라 서로 이해하면서도 또 각자로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런 생각을 담은 영화를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의 왼쪽부터 주연 배우 오정세, 유다인 그리고 이태겸 감독이 19일 롯데시네마 건대입구에서 진행된 언론배급 시사회 및 기자간담회에 참석했다. [사진 영화사 진진]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의 왼쪽부터 주연 배우 오정세, 유다인 그리고 이태겸 감독이 19일 롯데시네마 건대입구에서 진행된 언론배급 시사회 및 기자간담회에 참석했다. [사진 영화사 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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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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