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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보호인가, 쇄국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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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강혜란 기자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
강혜란 문화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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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들이 우리 고미술을 사고 싶어도 반출이 불가능하니 살 수가 없다. 문화재청 측은 헌 나무라도 50년이 넘는 것은 모두 검열하는데 그저 평범한 자료에 불과한 많은 것들까지 굳이 우리가 꼭꼭 쥐고 있어야 하나.” 지난해 말 ‘허물어지는 고미술 시장, 그 진단과 처방’이라는 이름의 전문가 좌담회에서 정대영 동인방 대표의 하소연이다. 참석자들은 미술품·문화재의 해외 반출을 금지함으로써 우리 스스로 우리 자산의 가치를 깎고 있다고 아쉬워했다.

그런데 고미술뿐일까. 예컨대 이건희 삼성 전 회장 타계 후 관심을 모으는 그의 컬렉션 중엔 이중섭·박수근 등 근현대 거장들의 그림들도 있다. 삼성가는 이 컬렉션에 대한 감정평가를 의뢰하면서 이들 작품은 제외했다고 한다. 처분 의사가 없을 수도 있지만, 설사 있다 해도 이중섭·박수근 작품이 글로벌 시장에 선보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1950~60년대 타계한 이들의 전 작품이 제작 연대상 ‘일반동산문화재’의 조건에 부합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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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4월 개정안이 발효된 문화재보호법 시행령에 따르면 제작된 지 50년 이상 된 미술·전적류 등 가운데 역사적·예술적 또는 학술적 가치가 있고 상태가 양호한 것들 중에서 희소성·명확성·특이성 중 하나 이상을 충족하면 일반동산문화재로 분류된다. 이렇게 되면 국외 수출·반출이 금지되고, 해외 전시 등이 목적일 땐 문화재청장 허가를 받아야 한다. 올해 기준으로 1971년 이전 제작된 근현대 수작들은 판매든 기증이든 공항 출국 전 ‘일단 멈춤’ 대상이다.

‘50년 규정’이 처음 나온 것은 1970년대였다. 이후 몇 번 뒤바뀜이 있다가 2008년 이후 유지되고 있다. 이번 개정안에도 50년 원안이 유지된 것은 “문화재 보호에 대한 뚜렷한 의지 때문”이라고 문화재청 감정위원이 설명했다. “당시에 가치를 잘 몰라서 내보냈던 문화재들을 이제 와서 환수 노력도 하는 마당이다. 미래 국민이 문화유산을 향유할 권리를 우리 세대가 박탈해서 되겠나.”

“내 그림이 비행기를 탔겠네.” 1955년 이중섭 작품에 매료된 미국 소령이 그의 은지화(담뱃값 은박지에 그린 그림) 세 점을 구입해 뉴욕 현대미술관에 기증했다는 소식을 듣고 작가가 한 말이다. 이젠 해외 유명 미술관이 아무리 높은 값을 불러도 그의 그림이 이 땅을 떠나진 못한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고미술 해외반출을 원칙적으로 금지한 것을 ‘문화재 쇄국주의’라고 지적하면서 “한 나라의 문화재는 이역 땅에서 그 나라의 문화 외교사절 역할을 한다”고 상기시켰다. 이중섭 그림이 더 이상 뉴욕행 비행기를 못 타는 게 문화재 보호일까, 쇄국일까.

강혜란 문화팀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