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더오래]부실투성이 요양병원에 코호트 발동하는 잔인한 사회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조용수의 코드클리어(62)

늦은 밤,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스트레쳐카에 노인이 실려 온다. 환자는 반혼수 상태로 불러도 대답이 없다. 맥박은 겨우 만져지는 수준이고 혈압은 너무 낮아 측정조차 되지 않았다. 굳이 의사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노인에겐 이미 죽음이 임박해있음을.

“어떻게 된 환자인 거죠?”

소견서엔 ‘전신 상태 악화로 전원합니다’는 한 줄이 전부다. 동승한 의료진은 환자의 병력을 전혀 알지 못했다. 보호자는 인제야 연락받고 오는 중이라고 했다. 환자 상태에 관해 설명해주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답답했다. 아무런 단서도 받지 못한 채 어려운 문제를 풀어야 한다니. 알 수 있는 건 단 하나. 당장 손 쓰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것뿐. 위중한 환자를 아무런 사전연락도 없이 무책임하게 토스한 의사의 낯짝이 궁금했다.

급하게 기관삽관과 소생술을 시행했다. 한 시간쯤 지나니 겨우 환자가 안정을 되찾았다. 일단 고비는 넘겼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하루 이틀 된 몸 상태가 아니었다. 나빠진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환자임이 틀림없었다. 대체 어디서 어디까지 손을 써야 할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뒤늦게 도착한 보호자는 상황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하지만 분노의 포인트가 내 예상과 조금 달랐다. 위중한 상태에 화가 난 게 아니라, 노인을 굳이 왜 살려냈냐며 화를 냈다. 보호자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누구 맘대로 인공호흡기를 달았냐고 화를 냈다. 식물인간이 되면 대신 병원비를 내줄 거냐고 따졌다. 다 늙은 환자를 왜 고통스럽게 하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거듭되는 시비에 나도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이럴 거면 응급실에 왜 데려왔습니까?”

대학병원 응급실에는 다양한 환자가 오지만 그중에서 가장 난해한 환자는 요양병원 환자다. [사진 Pixabay]

대학병원 응급실에는 다양한 환자가 오지만 그중에서 가장 난해한 환자는 요양병원 환자다. [사진 Pixabay]

이번에도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보호자가 원해서 온 게 아니라고 했다. 애당초, 편히 보내드리기로 이전에 입원해 있던 병원과 이야기가 끝난 상태였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은 하필이면 고열이 발생했고, 그러자 담당 의사가 화들짝 놀라 급히 환자를 이쪽으로 보낸 것이었다. 그놈의 코로나 걱정에. 다행히 검사 결과는 음성이었지만, 그 병원은 격리실이 없어 잠복기가 끝나는 14일간 환자를 돌려받을 수 없다고 했다. 보호자는 어떤 치료도 하지 말라며 두 눈을 부릅뜨고 나를 막아섰다. 대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우리는 모두가 불행했다.

대학병원 응급실에는 다양한 환자가 전원 온다. 그중에서 가장 난해한 환자는 두 번 고민할 것 없이 요양병원 환자다. 상태도 무척 안 좋을뿐더러 환자의 병력 청취도 쉽지 않다. 격리가 필요한 까다로운 내성균이 나오는 일도 잦다. 반면 보호자는 치료 의지가 없는 경우가 많다. 가끔은 장례식장으로 가야 할 차가 응급실로 잘못 들어온 게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물론 열심히 운영하는 요양병원도 많다. 고령의 환자에게 꼭 필요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며 사명감을 되새기는 의료진도 많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다. 모두 알면서도 밖으로 차마 말하지 못하는, 부실투성이 요양병원도 부지기수다. 나무위키 사이트에는 요양병원을 ‘회복 불가능한 노인 환자가 여명을 보내기 위해 입원하는 병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사람들이 요양병원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대충 짐작이 간다.

사람들 기대치가 그러하니 병원 운영도 그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모두가 만족이다. 가족들은 노인수발이라는 귀찮음과 번거로움을 피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덜 수 있다. 병원은 최소한의 투자로 품을 아끼면서도 고정적인 수입을 올릴 수 있어서 좋고, 정부는 고령화 시대 노인 복지를 손 안 대고 코 풀 수 있어서 좋다. 삼박자의 니즈가 맞으니, 모두가 행복하다. 어쩌면 환자도 만족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이렇게 잔인한 사회에 민폐를 덜 끼쳐도 되니 말이다.

코호트 격리가 발동된 순간 그들의 운명은 이미 정해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말 그대로 집단면역의 실험장이다. [중앙포토]

코호트 격리가 발동된 순간 그들의 운명은 이미 정해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말 그대로 집단면역의 실험장이다. [중앙포토]

최근 요양병원에서 코로나가 유행 중이다. 많은 환자가 사망했다. 시설과 인력이 열악하며, 게다가 밀집 생활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그래서 평소에도 감염병이 잦고 다제내성균이 빈발하는 장소이다. 더구나 구성원은 거동이 불편하고 취약한 환자들이고. 이런 곳에 코호트 격리가 이루어진다? 똥오줌 시중까지 들어야 하는 판국일 텐데, 의료진 한둘이 수십 명의 환자를 보호구를 입은 채 감당한다? 애당초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러니 환자가 한 명 나오기 시작하면 병원 내 감염되는 건 순식간이다. 코호트 격리가 발동된 순간 그들의 운명은 이미 정해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말 그대로 집단면역의 실험장이다. 가장 나이가 많고 기저질환이 많은 노인을 대상으로. 옴짝달싹할 수 없는 환경, 하루하루 조여오는 감염병, 한 명 한 명 유명을 달리하는 사람들…. 상상만으로 몸서리가 쳐진다. 살아있는 지옥이 따로 없다. 이토록 끔찍한 설정은 어느 공포 영화도 감히 시도하지 못하리라.

뻔히 예상된 코로나 취약 공간에 이제껏 어떤 대책도 세우지 않은 정부에 몹시 화가 난다. 하지만 동시에 좀 더 근본적인 불편감도 같이 든다. 대체 우리 사회에서 요양병원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다. 연명 중지 동의서에 줄줄이 서명되어 있고, 보호자도 굳이 치료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들을 치료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격리) 자원을 사용하는 게 맞을까? 어쩌면 현재 정부의 대응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인 건지도 모른다. 두꺼운 가면을 벗기고 나면, 실상 우리 사회는 그들이 코호트 된 채 죽기만을 바라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무서운 의심이 자꾸 든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가 불행하다.

전남대학교병원 응급의학과 조교수 theore_creator@joongang.co.kr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