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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다시 코로나와 전쟁…폐쇄 동안 전열 다듬은 응급실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조용수의 코드클리어(60)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설국』의 첫 문장이다. 많은 사람이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소설 첫 문장으로 꼽길 주저하지 않는. 단 한 문장을 읽었을 뿐인데 독자는 어느새 설국에 도착해 있다.

코로나19로 잠정 폐쇄했던 응급실 문을 다시 열었다. 긴 터널을 지나 나는 환자 앞에 섰다. 응급실은 이미 환자로 가득했다. 문 닫기 전과 차이가 없었다. 각양각색의 환자가 저마다의 모습으로 고통을 표현했다. 누군가는 고꾸라졌고, 누군가는 쥐어 뜯겼으며, 또 누군가는 빨간 피를 적셨다. 너무나 익숙한 광경 그대로다.

내가 있어야 할 곳에서 나는 필요 없는 존재였다. 텅 빈 응급실에 그저 오도카니 서 있을 따름. 코로나는 의사와 환자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앗아갔다. [중앙포토]

내가 있어야 할 곳에서 나는 필요 없는 존재였다. 텅 빈 응급실에 그저 오도카니 서 있을 따름. 코로나는 의사와 환자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앗아갔다. [중앙포토]

매일같이 이 끔찍한 지옥의 현장이 잠시라도 멈추길 바랐는데, 막상 응급실이 폐쇄되니 전혀 즐겁지 않았다. 누군가가 복사한 듯 가지런히 놓인 빈 침대는 나를 색 없는 밑바닥으로 끌고 내려갔다. 환자가 없는 곳에서 의사는 존재의 의의를 상실했다. 내가 있어야 할 곳에서 나는 필요 없는 존재였다. 텅 빈 응급실에 그저 오도카니 서 있을 따름. 코로나는 의사와 환자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앗아갔다.

무력함을 이기기 위해 움직였다. 사람들은 어제 했던 청소를 오늘 또 되풀이했다. 빈틈이 보인다며 부지런을 떨었지만, 내 보기엔 어제 한바탕 소란을 똑같이 한 번 더 반복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결벽증인지 아니면 뭐라도 하지 않으면 불안함을 이길 수 없는 건지. 며칠에 걸친 소독 작업이 끝나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렇게까지 먼지 한 점 없는 응급실은 10년 만에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365일 24시간 환자로 가득 찬 공간. 그래서 꼭 한번은 모든 걸 치워내고 묵은 때까지 빡빡 벗겨내고 싶었다. 그래야만 속이 시원하겠다 싶었었다. 역설적으로 코로나가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이제 환자들이 응급실을 다시 찾더라도 감염을 걱정할 일은 없을 것이다. 코로나는 자신뿐 아니라 응급실의 온갖 더러운 것과 함께 이곳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소독약이 닿기 어려운 구석구석까지 그야말로 모든 것을 닦아냈기 때문이다.

전 국민이 코로나와 힘든 전쟁을 벌이고 있는 판국에 전장에서 이탈했으니, 그에 대한 부채 의식이 없을 리 없었다. 마냥 손을 놓고만 있어선 안 될 거 같았다. 우리는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로 했다. 웅크린 만큼 더 도약하기로. 그래서 많은 것을 준비했다. 문을 닫아 텅 빈 응급실에 막대한 비용을 들어 격리실을 추가로 마련했다. 병원 폐쇄로 천문학적인 손해가 발생했지만, 오히려 재정을 투입하는 강수를 두었다. 늘어나는 지역사회 코로나 환자를 감당해내기 위해, 위중하고 급한 응급환자를 잃지 않기 위해. 우리는 시설을 갖추고 프로토콜을 짰으며 세밀한 계획을 세웠다. 그렇게 긴 터널을 한 호흡도 쉬지 않고 달려왔다. 그리고 마침내 설국이다.

매일같이 이 끔찍한 지옥의 현장이 잠시라도 멈추길 바랐는데, 막상 응급실이 폐쇄되니 전혀 즐겁지 않았다. 누군가가 복사한 듯 가지런히 놓인 빈 침대는 나를 색 없는 밑바닥으로 끌고 내려갔다. [사진 pxhere]

매일같이 이 끔찍한 지옥의 현장이 잠시라도 멈추길 바랐는데, 막상 응급실이 폐쇄되니 전혀 즐겁지 않았다. 누군가가 복사한 듯 가지런히 놓인 빈 침대는 나를 색 없는 밑바닥으로 끌고 내려갔다. [사진 pxhere]

마땅히 태워야 할 주인을 잃었던 침대. 새하얀 이불만 놓인 채 덜컹덜컹 바퀴 소리만 요란했던 침대. 그 위로 하나씩 환자가 놓이기 시작했다. 굳게 닫은 철문이 올라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화벨이 쉬지 않고 울려댔다. 몇 달간 수거한 적 없는 우편함처럼 환자가 응급실로 쏟아져 내렸다. 빈 침대는 순식간에 환자들로 차올랐다. 한꺼번에 들이닥친 파고에 중심을 잃고 휘청일 정도로. 몰려든 환자에 깔려 숨을 못 쉴 정도로. 그렇다. 비로소 돌아온 것이다. 다들 넘치는 아드레날린을 쏟아냈다. 어제까지 풀 죽어 있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역시 우리는 응급실에 영혼이 매인 천생 의사들이다.

오랜 시간 많은 환자에게 불편함을 끼쳐 송구하다. 대신 우리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전장에 다시 섰다. 위기는 기회가 되었다. 우리는 아무것도 없이 깨끗한 백지 환경에서 병마와 총력전을 벌일 수 있게 되었다. 마침 상황은 바야흐로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다행히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자신감에 가득 차 있다. 열심히 준비한 만큼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는 이곳에 단 하나의 코로나바이러스도 발붙이지 못할 것이다. 아픈 몸을 이끌고 응급실을 찾는 환자가 더는 불안감에 시달리지 않도록.

함께 이겨냅시다.

전남대학교병원 응급의학과 조교수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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