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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고정애의 시시각각

대통령은 정치하는 자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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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고정애 기자 중앙일보
고정애 논설위원

고정애 논설위원

문재인 대통령이 어쩌면 마지막 대통령비서실장일지 모를 사람을 정할 때 심경이 궁금했다. 문 대통령이 실장이 될 때 마음은 그의 저서 『운명』에 나와 있다. “진심으로 맡고 싶지 않았다.” 문 대통령은 당시 참모들에게 “참여정부(노무현 정부)에 하산은 없다. 끝없이 위를 향해 오르다가 임기 마지막 날 마침내 멈춰선 정상이 우리가 가야 할 코스”라고 강조했지만 스스론 정무적 자질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선택적 침묵·책임이 문제인데 #청와대는 “정치 대신 정책” 조짐 #이제라도 잘못 수정하는 정치 해야

노 전 대통령이 했을 법한 얘기는 저서에 담겨 있지 않다. ‘2007년 3월 노 대통령이 다시 불렀다’는 문장은 곧바로 ‘참여정부 청와대 마지막 비서실장을 맡게 됐다’로 이어졌다. 노 전 대통령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문 대통령이 유영민 비서실장을 염두에 둔 지는 제법 된 듯하다. 두 달여 전부터 부산을 중심으로 유 실장 발탁설이 돌았으니 말이다. 당시 청와대 참모 중엔 “턱도 없다”는 반응을 보인 이도 있었다고 한다. 최근엔 여권 수뇌부와 의원 그룹, 부산파들이 양정철 전 민주연구원장, 우윤근 전 러시아 대사, 이호철 전 민정수석을 각각 밀었다는 말도, 최재성 청와대 정무수석이 부상한다는 전언도 있었다. 10여 일 전엔 유 실장의 정책실장 발탁설도 나왔다.

문 대통령은 결국 유 실장을 택했다. 정무적 역할을 절감했다던 문 대통령이 후보군 중 가장 정무와 거리 있는 이력의 유 실장을 고른 걸 두고 이런저런 해석이 나온다. “여러 그룹 간 타협”이라거나 “대통령이 가장 편한 사람을 고른 것” 등이다.

또 “문 대통령이 정치와 거리를 두고 정책에 집중하려 한다”는 이른바 ‘탈정치 행보’ 해석도 있다. 청와대도 비공식적으론 “마지막이자 선거 있는 해이니 정책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정치와 거리를 두겠다는 속내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익명을 요청한 여권 인사도 “노 전 대통령처럼 정치 드라이브를 걸진 않을 것”이라고 했다. 임기 마지막까지 대연정, 원포인트 개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추진, 남북 정상회담 등을 밀고 나간 노 전 대통령과는 달리 정치적 쟁점을 만드는 일은 피할 것이란 얘기다.

노 전 대통령이 문 대통령의 반면교사일 순 없다고 본다. 문 대통령은 정치를 멀리하듯, 안 하는 듯하며 정치를 했다. 지지자만 바라봤다. 이런 ‘정치의 부재’가 ‘정치 과잉’으로 이어지곤 했다. 소극적인 대통령이지만 ‘청와대 정부’를 이끌었고 갈등과 거리를 두지만 결국 논란의 종착지가 문 대통령으로 귀결되는 식이다. 추·윤 갈등이 그렇고, 백신 늑장 수급 논란이나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 사면 문제도 그렇다.

일련의 논란 속에서 문 대통령의 선택적 침묵이 확연했고, 그 본질은 선택적 책임이란 것도 확인됐다. 말만 안 하는 게 아니라 대통령이라면 의당 참여하고 주도하고 책임져야 할 의사 결정 과정에서도 비켜서 있었다는 사실 말이다. 많은 이의 마음을 후벼팠던 ‘빵 발언’이 나온 김현미 전 국토교통부 장관의 2020년 11월 30일 국회 현안질의도 한 예다. “대통령과 부동산 문제를 갖고 얘기한 가장 최근 시점이 언제인가”란 질문을 연거푸 받은 김 전 장관은 “몇 달 된 것 같다”고 했다. 김 전 장관은 문 대통령의 대표비서실장 출신인데도 그랬다.

최근의 이런저런 논란에 대해서도 “대통령이 뭐했느냐”를 물으면 청와대는 “대통령은 지시했다”고 해명한다. 대통령이란 결과에 무한책임져야 하는 자리임에도 지시하면 면책된다고 착각했다.

여권의 누군가는 “청와대가 지금 임기 말, 그리고 퇴임 후 사고가 안 나게 하려는 데 온 정신이 쏠려 있다”고 전했다. 그렇다면 문 대통령의 접근법은 ‘더한 정치’여야 한다. 정치로부터의 도피가 아닌, 그간 잘못을 바로잡는 정치를 해야 한다. 한·일 위안부 합의를 깰 때의 기세만큼이나 수습하는 기세도 보여야 한다는 말이다. 지지자만의 대통령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정치해야 한다. 대통령은 정치하는 자리다.

고정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