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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예영준의 시시각각

진보·보수보다 더 중요한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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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예영준 기자 중앙일보
예영준 논설위원

예영준 논설위원

강준만·진중권처럼 유명 인사는 아니지만 필자의 지인 중에서도 문재인 정부 출범을 지지했다가 이제 그 지지를 철회한다는 사람이 적지 않다. 젊은 시절 민주화운동에 참여했고 스스로를 진보라 자처하는 사람 혹은 객관적인 잣대로 봐도 진보 진영에 속하는 사람들이 그 대열에 섰다. 민주당 당적으로 한때 선출 공직을 맡기도 했던 A씨의 정부 비판은 그 어느 보수 인사보다 더 신랄하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현 집권세력은 “진보도 아닌, 그저 진보 행세를 하며 권력놀음만 하는 자들”이다. 투표권을 가진 이래 줄곧 현재의 여당 계열에만 표를 줬다는 중산층 B씨는 언제부턴가 “문재인 대통령 찍은 걸 후회한다”고 한다.

문재인 지지 철회 늘어나는 #진보 지지층과 30·40대 유권자 #국민이 원하는 건 실력 있는 정부

온라인 공간에서는 그런 유(類)의 후회를 담은 댓글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고 있다. 세대별로 봐도 마찬가지다. 문재인 정부의 강고한 지지층이던 30, 40대층에서도 이탈자들의 흐름이 눈에 보일 정도가 됐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대통령 지지율이 계속 내리막길인 건 ‘집토끼’들이 하나둘씩 토끼장 문을 열고 가출한 데 따른 결과다.

이들 이탈자들 대다수가 진보에서 보수로 이동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적어도 내 주변의 지인들만 보면 그렇다. 진보에 대한 지지 혹은 믿음은 간직한 채 현 정부에 대한 지지만 접고 있다는 얘기다. 이유는 자명하다. 현 정부의 주축을 이루는 세력이야말로 ‘진짜 진보’가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A씨의 표현처럼 진보 행세만 하거나 혹은 진보를 팔아 이익을 챙기고 있다는 얘기다. 자신의 잇속은 차릴 대로 차려 놓고 겉으로는 약자의 편에 선 정의의 사도인 양하는 위선 혹은 자기기만, 스스로가 기득권화돼 있으면서도 노론 집권 이래의 강고한 기득권 지배구조를 깨야 한다는 허구의 역사의식, 일신의 영달을 바라고 한 것이 아니라면서도 민주화 유공자에 대한 보상이 자녀에게까지 이어져야 한다고 법을 만드는 이기심, ‘법치 파괴’라고 써놓고 ‘검찰 개혁’이라 읽는 몰개념 등등의 이유들이 차고 넘친다.

하지만 그런 위선과 허위가 지지율 하락을 설명하는 전부는 아닐 것이다. 정부의 ‘실력’이 바닥을 드러낸 것이야말로 지지율 하락의 근본적 원인이라 본다. 자본주의 국가의 유권자는 정부가 도덕군자의 집합체이어야 한다고 고집하지 않는다. 그저 먹고사는 문제를 잘 해결해 주는 정부를 원할 뿐이다. 그런 소박한 기대를 배반한 것이 부동산 정책이다. 여론조사에서 현 정부가 잘못하고 있다는 사례로 부동산 정책이 압도적 비중을 차지하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24번의 정책이 소용이 없었으니 이건 실력 부족이라고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시장에서는 솜씨 서툰 목수에게 연장을 내려놓으라고 아우성이다.

글로벌 백신 확보전에서 한참 뒤처진 것도 실력 부족 탓이다. 국민을 마루타로 만들지 않겠다는 배려 때문이라고 변명해도 통하지 않는다. 내 손에 넣지 못한 백신을 ‘신 포도’라 단정하고 돌아서는 이솝 우화 속 여우만 떠올리게 할 뿐이다. 약자의 편에 선다고 해놓고 약자를 더 어렵게 만든 경제정책이나 제대로 된 해결책조차 내놓지 못한 청년 일자리 문제나 플랫폼 노동자 문제 역시 마찬가지 이유다.

진보건, 보수건 국민이 원하는 건 실력 있는 정부다. 대의민주주의가 시작된 이래 한 번도 변하지 않았을 명제다. 정치학자 이갑윤·이지호의 저서 『대통령 노무현은 왜 실패했는가』는 노무현 정부 2.0을 자처한 문재인 정부에 보낸 충고로도 읽힌다. 거기에 이렇게 적혀 있다.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기초 실력이 없는 사람이 잘할 수 있는 일이란 한계가 있는 법이다. 그럼에도 하고 싶은 일을 잔뜩 벌이면 결과는 오죽하겠는가. 어떤 이는 미리 알았겠지만 다수의 국민이 이를 깨닫는 데 3년 반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예영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