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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꼴통 진보를 버린 아름다운 배신자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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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고대훈 기자 중앙일보 기획취재1국장
고대훈 수석논설위원

고대훈 수석논설위원

문재인 대통령은 자서전 『문재인의 운명』에서 고백했다. “신의 섭리 혹은 운명 같은 것이 나를 지금의 자리로 이끌어 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의지가 아닌 운명에 끌려 정치의 길로 들어섰다. 노무현과의 만남과 ‘검찰에 의한 정치적 타살’이 권력을 향한 그의 운명을 호출했다는 의미다. 또 “장강후랑추전랑(長江後浪推前浪)이라고 했던가. 장강의 뒷물결이 노무현과 참여정부라는 앞물결을 도도히 밀어내야 한다”고 썼다. 스스로 장강의 뒷물결이 되어 권력을 쟁취하겠다고 다짐했고, 운명의 힘으로 성공했다.

정권 밀던 3040세대·중도층 이탈 #윤석열 지지 선회로 가짜진보 응징 #운동권 마피아의 폭주를 막으려면 #정의로운 배신자들이 더 늘어나야

윤석열 검찰총장의 운명이 오버랩된다. “우리 총장님”으로 맺은 문 대통령과 인연은 ‘조국 수호 전쟁’과 ‘추미애 활극 전쟁’을 치르면서 혁명정권의 핍박에 맞서는 기구한 악연으로 전환됐다. 그런 고독한 투사의 아우라가 본인 뜻과 상관없이 그를 대권이란 정치 무대로 끌어올렸다. 윤석열이 문재인 정권이란 앞물결을 밀어내는 장강의 뒷물결이 될 운명인가. 2021년에도 코로나·부동산과 함께 그의 운명은 최대의 관심사다.

중도층 이탈, 레임덕 위기, 윤석열의 미친 존재감. 새해 쏟아지는 여론조사 결과는 세 가지로 압축된다. 문 대통령은 핵심 지지층이 떠나면서 취임 후 가장 낮은 지지율(34.1%)을 기록했고, ‘통합’ 차원에서 박근혜·이명박 사면론을 꺼낼 만큼 다급해졌다. 윤석열은 처음으로 30%대를 돌파하며 강력한 대권 주자로 떠올랐다. (리얼미터 조사 기준) 단순히 계산하면, 2020년 1월 조국 사태 후 윤석열 지지율은 10%대였는데 1년 사이 추미애가 20%를 보태줘 30%대까지 치솟았다. 반면 지난해 4·15 총선 직후만 해도 60%대이던 문 대통령의 지지는 30%가량이 빠져나갔다.

윤석열을 탄압할수록 그는 뜨고 문 대통령은 지는 지지율 30%의 수평이동은 주목할만한 현상이다. 자칭 진보 정권을 밀던 3040세대와 중도층, 이름하여 ‘민주시민’이 변절했다는 점이다. 조국·추미애를 내세워 1년 4개월에 걸쳐 윤석열 몰아내기 과정에서 보인 권력의 광기적 행태에 대한 응징이다. ‘내가 하면 개혁, 남이 하면 쿠데타’라고 우기고, 비리 가족을 골고다 언덕의 예수에 빗댈 정도로 실성한 집단에게 학을 떼고 있다. 퇴행적 꼴통 진보를 버리고 지지 철회의 반기를 든 이탈자가 느는 이유다. 이들을 ‘아름다운 배신자들’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배신자들은 비이성적 집단의 박해와 정치적 폭력에 대항해 홀로 싸우는 윤석열의 배짱과 용기를 평가한다. 정의와 공정에 대한 타는 목마름을 적셔줄 영웅에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지지로 응답한다. 현란한 혀의 놀림보다 “헌법정신, 법치주의, 상식을 지키겠다”는 너무도 당연한 말에 감격한다. 윤석열 지지 증가율이 구닥다리 보수 지지율에 반영되지 않는 걸 보면 이들은 좌우와 진보·보수를 넘어선 합리적인 시민임이 틀림없다.

중국에 일산불용이호(一山不容二虎)란 속담이 있다. 하나의 산에 두 마리 호랑이가 공존할 수 없다는 뜻이다. 윤석열은 조국과 추미애를 산 밖으로 내치는 1, 2차 대전에서 일단 승리했다. 마음의 빚을 진 조국의 누명을 벗겨주고, 검찰 개혁을 저지하는 악(惡)의 세력을 제거하려던 정권의 구도가 무너졌다. 하지만 ‘윤의 고행’은 끝나지 않았다. ‘권력의 산’에는 한 마리의 호랑이만 남는 법. 최후의 3차 대전이 다가오고 있다. 정권의 사람들은 윤석열 찍어내기 거사의 뼈아픈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벼른다. 공수처를 곧 출범시켜 월성 원전 경제성 조작 의혹 등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수사’를 접수할 모양이다. 그것도 모자라면 검찰의 직접 수사권을 아예 박탈해 권력형 비리의 근처에 얼씬도 못 하게 원천봉쇄하겠는 입장이다. 탄핵 운운 갈구면서 종이호랑이로 만들 궁리도 숨기지 않고 있다.

윤석열의 친구 몇몇에게서 들은 그의 근황이다. “일방적으로 패다가 이제 그만두자는 게 말이 되는가”가 당장 사퇴할 수 없는 이유다. “어떡하든 임기를 끝까지 마치고 싶다”는 각오다. “솔직히 내 앞날을 나도 모르겠다. 하겠다고 되는 것도, 도망간다고 피할 수 없는 것 아니다”는 착잡한 심정이다. “여론의 지지가 나를 버티게 한 힘이다. 그래서 정치권에서 함부로 못 하는 거다”라고 이해한다. 여론이 그의 생명줄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진보라는 용어가 많이 오염됐다. 오죽하면 좌파 지식인들조차 ‘민주 건달’ ‘싸가지 없는 진보’ ‘히빠’(문빠에 빗댄 히틀러빠)라고 공격하며 진보의 배신자를 자처하겠는가. 민주화와 개혁의 가치로 위장한 운동권 마피아의 폭주를 막으려면 정의로운 반란이 더 늘어나야 한다. 그래야 정신을 차리는 척이라도 할 오만한 권력이다.

정권 배신과 윤석열 지지는 현직 대통령과 180석 ‘혁명의회’가 자행하는 독선과 폭주가 자초한 일이다. 편가르기 사회를 만드는 사악한 무리에 대한 거부감이 세력으로 뭉치고 있다. 그 세력이 장강의 뒷물결에 대거 합류할지 아직 모른다. 윤석열의 운명도 그 향배에 달렸다. 상식을 아는 아름다운 배신자들이 있기에 새해에 작은 희망을 본다.

고대훈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