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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로컬 프리즘

‘산촌유학’ 오는 도시 아이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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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최경호 기자 중앙일보 광주총국장
최경호 내셔널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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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천면장이 맥주 따르데끼(따르듯이).”

맥주 거품이 많은 잔을 받았을 때 농담처럼 상대를 면박 주는 말이다. 맥주가 귀하던 60년대 초반 전남 강진의 옴천면장이 술을 따른 일에서 유래됐다. 당시 그는 맥주를 자주 접하지 못한 탓에 따뜻한 사기잔에 맥주를 따랐다가 전국적인 유명세를 치렀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미지근한 맥주가 거품투성이가 되면서 1병으로 8명에게 술잔을 건넸다는 내용으로다.

옴천 주민들은 이 말을 웃어넘기면서도 달가워하지 않은 눈치다. 시대는 지났지만 그만큼 옴천이 도회지에서 먼 오지(奧地)라는 뜻이 담겨 있어서다. 옴천은 ‘남도답사 일번지’로 알려진 강진읍내에서 20㎞가량 떨어진 시골이다. 민물새우인 토하(土蝦)젓갈로 유명한 이 곳에는 초등학교 1개, 식당 1개가 있다.

맥주 해프닝이 벌어진 지 60여년 후. 인구 650명인 작은 시골마을에 뜻밖의 변화가 찾아왔다. 서울·경기를 비롯한 도시 학생들이 유학을 오기 시작했다. 너도나도 떠나기 바쁜 농촌에 도시 학생이 전학 오는 일은 가히 기현상이라 부를 만한 일로 여겨졌다. 현재 옴천초교는 전교생 36명 중 8명이 도시에서 온 유학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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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본 전남도교육청은 ‘산촌유학’이란 카드를 꺼내 들었다. 코로나19 시대를 맞아 도시 학생들을 시골학교로 전학시키는 프로그램이다. 전남은 초·중·고교의 43%(380개)가 전교생 60명 미만의 ‘작은 학교’다. 대부분 교문을 나서면 넓은 들녘과 숲, 강, 산자락을 끼고 있어 자연스럽게 힐링 교육이 된다.

“팬데믹 상황에선 농촌의 학생들이 경쟁력이 뛰어나다”는 점도 강조했다. 올해 시골에서는 코로나19 상황에서도 대부분 수업이 이뤄진 점을 부각한 마케팅이다. 여기에 농촌학교는 면적이 넓지만 학생 수가 적어 방역에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현재까지 옴천면을 비롯한 강진군에서는 단 한 명의 코로나19 확진자도 나오지 않았다.

결국 지난 7일 서울에서는 이례적인 행사가 열렸다. 전남도교육청과 서울시교육청이 체결한 ‘농·산·어촌 유학 운영을 위한 업무협약’ 자리였다. 협약은 서울 학생들을 전남의 작은 학교로 6개월 이상 유학 보내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과거 지방에서 학생들을 서울로 보내려고 수도권 학교들과 자매결연 등을 맺었던 것과는 180도 달라진 풍경이다.

옴천초교 학생들은 매일 아침 교장 선생님과 숲길을 걸으며 대자연을 만끽하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학원에서 파김치가 되는 도시 학생과는 달리 반딧불이 교실 등으로 일과를 마무리하는 것도 인성교육에 큰 도움을 준다고 한다. 훗날 코로나19 시기를 농촌에서 보낸 학생들이 어엿한 사회구성원이 된다면 이런 말도 나오지 않을까 싶다.

“옴천학생이 코로나도 모르데끼(모르듯이).”

최경호 내셔널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