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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 필요할 때…김아림, 22년 만에 US오픈 드라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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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김아림이 14일(한국시간)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의 챔피언스클럽에서 벌어진 US여자오픈 최종라운드 1번 홀 랜선 응원 모니터 앞에서 티샷을 하고 있다. 김아림은 “내가 걸리는 건 상관없지만 다른 사람이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될 수도 있다”며 경기 내내 마스크를 썼다. [AP=연합뉴스]

김아림이 14일(한국시간)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의 챔피언스클럽에서 벌어진 US여자오픈 최종라운드 1번 홀 랜선 응원 모니터 앞에서 티샷을 하고 있다. 김아림은 “내가 걸리는 건 상관없지만 다른 사람이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될 수도 있다”며 경기 내내 마스크를 썼다. [AP=연합뉴스]

1998년 7월 7일. US여자오픈에서 연못가에 떨어진 골프공을 ‘맨발의 투혼’으로 쳐내며 우승한 박세리(당시 21세)는 IMF 외환위기로 신음하는 한국인에게 희망을 안겼다. 22년 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힘겨워하는 한국에 데자뷔의 낭보가 날아왔다.

코로나로 예선 무산돼 출전 행운 #김, 첫 참가자 5번째 US오픈 우승 #5타 차 선두 최종 라운드서 뒤집어 #“내 우승, 누군가의 기쁨 됐으면…”

김아림(25)이 15일(한국시간)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의 챔피언스클럽에서 벌어진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US여자오픈에서 최종합계 3언더파 281타로 고진영(25) 등을 한 타 차로 제치고 우승했다. 여자골프 최고 권위의 US여자오픈에서 첫 출전자가 우승한 건 김아림이 역대 다섯 번째다. 그의 우승은 코로나19로 더 추운 겨울을 보내는 국민에게 따뜻한 위로가 됐다.

김아림은 어릴 적 수영, 농구, 태권도, 육상 등 안 해 본 운동이 없었다. 덩치도 크고 운동신경이 좋아 조금만 해도 쑥쑥 늘었다. 그래서 재미가 없었다. 김아림은 “골프는 해도 잘 안 되기 때문에 도전해 보고 싶었다”고 기억했다. 그와 동갑내기인 고진영, 김효주 등은 어릴 때부터 프로처럼 잘했다. 김아림은 한참 뒤였다. 김아림은 2부 투어에서 뛸 때 KLPGA와의 인터뷰에서 “성적이 안 좋으면 속상하지만 충실히 연습하면 언젠가는 빛을 볼 것이라고 믿었다”면서 “눈 뜨면 골프를 생각할 수 있어서 좋고, 자면서도 좋았다. 사람들이 ‘그렇게 좋으냐’며 이해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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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175cm에 장타를 치는 김아림은 2016년 KLPGA 투어에 입문했고, 2018년 첫 우승을 했다. 박성현을 이을 차세대 스타로 꼽혔다. 장타만큼 주목받은 게 그의 밝은 미소와 배꼽 인사다. 팬들이 박수를 보내면 마치 유치원 꼬마가 그러듯 두 손을 배 위에 놓고 인사한다.

김아림은 지난해 10월 암초를 만났다. 하나금융그룹챔피언십에서 벙커에 깊이 박힌 공을 경기위원의 허락을 받고 꺼내 확인했다. 제자리에 놓을 때 원래 있던 자리보다 좋은 곳에 놓고 쳤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시청자 제보 등으로 논란이 됐다.

함께 있던 경기위원이 문제없다고 유권해석해 김아림이 책임질 일은 없다. 그러나 그는 “동료 선수와 협회 등에 피해를 준 것 같아 책임져야 한다”며 기권했다.

박세리, 외환 위기 때 ‘맨발의 투혼’

골프는 멘털 스포츠다. 이후 김아림의 성적이 좋지 않았다. 올해는 코로나19까지 겹쳤다. 우울한 2020년이었다. 그의 미소와 배꼽 인사가 점점 줄었다. 올해 그의 상금랭킹은 21위까지 떨어졌다.

메이저대회는 대부분 여름에 열린다. 해가 가장 길 때, 가능한 한 많은 선수가 참가해 기량을 겨루게 한다. 올해 US여자오픈은 코로나19의 영향으로 12월에 열렸다. ‘12월의 US여자오픈’은 ‘8월의 크리스마스’만큼 모순적인 말이다.

김아림으로서는 이 모순이 행운이었다. 김아림이 이전에 US여자오픈에 참가한 적은 없다. 지역예선이 KLPGA 투어 일정과 겹치거나 US여자오픈에 다녀올 경우 시차 적응 문제 등으로 국내 투어에서 어려움을 겪을까 우려해서다.

숫자로 본 김아림 US여자오픈 우승

숫자로 본 김아림 US여자오픈 우승

올해는 12월 US여자오픈이라 문제가 없었다. 김아림에겐 자동출전권도 나왔다. 디 오픈이나 US오픈 등 오픈(open)이라는 이름이 붙은 대회는 말 그대로 열린 대회다. 지역예선 등을 통해 문호를 활짝 열어두고 누구든 참가해 실력을 겨루자는 뜻이다.

그러나 코로나19 때문에 지역예선이 열리지 못했다. 주최 측은 평소 세계랭킹 50등까지 주던 출전권을 75위까지로 늘렸다. 김아림은 70위였다.

그의 아이언을 후원하는 미즈노의 피팅 담당 박재홍 팀장은 US여자오픈 출전을 앞두고 김아림의 클럽을 보고 놀랐다. 3개월 만에 클럽 페이스가 닳았기 때문이다.

여성 프로의 경우 아이언을 1~2년을 써도 문제가 없다. 김아림은 남자 선수처럼 헤드스피드가 빠르고 어택앵글이 날카로워 빨리 해어진다. 그렇다 해도 3개월은 너무 빨랐다. 박 팀장은 “연습을 독하게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날 US여자오픈은 드라마틱했다. 선두와 5타 차 9위로 최종라운드를 시작한 김아림의 우승은 어려워 보였다. 김아림은 마지막 세 홀을 버디-버디-버디로 한 타 차 우승했다.

김아림 “피해 안주려 마스크 쓰고 경기”

김아림은 닥치고 공격 스타일은 아니다. 이미 10대 때 “나는 복싱으로 치면 핵펀치를 가진 아웃복서다. 수비적으로 경기하지만, 확신이 설 때면 공격한다”고 했다. 버디를 잡은 마지막 세 홀에서 드라이버를 한 번도 안 쓴 게 특이하다. 그는 우드와 하이브리드로 티샷했다. 언제 참을지, 언제 공격할지 냉정하게 판단하고 경기했다.

김아림은 우승 인터뷰에서 “안니카 소렌스탐을 동경했다”고 했다. 놀랍게도 이날 소렌스탐이 USGA 관계자를 통해 김아림에게 영상통화로 “잘했다. 우승을 즐겨라”고 축하해 줬다. 김아림은 환호성을 지르며 “정말 고맙습니다. 사랑해요!”라고 인사했다.

골프 여제 소렌스탐은 25세 때 US여자오픈으로 LPGA 투어 첫승을 거두고 72승의 금자탑을 쌓았다. 김아림도 25세에 US여자오픈에서 첫 LPGA 우승을 차지했다.

김아림은 왜 마스크를 착용하고 경기했느냐는 질문에 “내가 걸리는 건 무섭지 않은데, 다른 누구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어 마스크 쓰고 치는 연습을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의 우승이 누군가의 기쁨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성호준 골프전문기자 sung.ho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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