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청계천 '쓰레기 고고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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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지난 7일 청계천 광통교(광교) 위 아스팔트와 콘크리트가 절단된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공사장을 찾아갔다. 현장 책임자는 한사코 "접근하지 말라"며 손을 내저었다. "꼭 보고 싶은 사연이 있다. 오래 전 복개된 상판 밑으로 들어가 다리를 살핀 적이 있는데 이번엔 길 위에서 광통교를 다시 보고 싶다"는 말을 거푸 전했다.

간신히 허락을 얻어 철제 울타리 안으로 들어섰다. 퀴퀴한 냄새가 풍기는 길 바닥의 틈새로 햇살을 받고 선 광통교의 거무스레한 교각이 시선에 들어왔다. 그 아래로 탁한 빛깔의 청계천 물길이 흘러가고 있었다. 순간 다리가 세워졌던 1410년, 그리고 복개로 어둠에 갇힌 1958년의 청계천 주변 풍경이 겹치면서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다.

94년 한여름, 종로구청의 협조를 받아 광통교를 답사하던 기억을 되살렸다. 어둠과 악취 속에서도 다리는 꽤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조선의 태종 이방원과 태조 이성계의 계비(繼妃) 신덕왕후 강씨가 빚었던 반목의 역사도 스쳐 지나갔다. 태종은 신덕왕후의 무덤인 정릉(貞陵)을 파헤쳐 지난 시절을 복수했다지 않은가.

당시 태종은 토교(土橋.흙으로 된 다리)였던 광통교가 홍수로 자꾸 떠내려가자 그것을 석교(石橋.돌로 된 다리)로 개축하면서 정릉의 신장석(神將石.잡귀를 쫓기 위해 무덤에 둘러친 돌) 12개를 옮겨 다리 석재로 삼았다. 혼백마저 장안 온 사람들의 발길에 밟히라는 태종의 저주가 담겼다는 해석은 섬뜩할 정도다. 하지만 청계천은 그런 비극의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큰 하수구 모양으로 흐르면서도 둔치에는 가늘고 맑은 모래를 쌓고 있었다.

온 얼굴을 적시는 땀으로 구청이 제공해준 마스크를 벗어버린 채 청계2가 쪽으로 걸어 내려갔다. 발 밑으로 둔치의 모래와 개흙이 번갈아가며 밟혔다. 그 퇴적층에서 '쓰레기 고고학'(garbage archaeology)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말이 떠올랐다. 서울 6백년의 생활사를 고스란히 건져 올릴 수 있다는 것. 바로 쓰레기 고고학인데 음식물 찌꺼기와 쓰레기 등에서 과거 사람들의 섭생과 영양, 심지어 질병까지 파악할 수 있음을 주목하는 학문이다.

당시 취재 결과를 신문과 월간지에 '청계천의 둔치는 살아 있다'라는 제목으로 실었다. 며칠 후 서울시 공무원이 찾아와 슬라이드 사진을 제공받고 싶다"면서 "광통교를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교통 흐름을 감안하면 현실적으로 그 자리에 복원하는 게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절대 어둠에 버려둬선 안된다. 유리통으로 된 지하보도를 설치하고 조명을 달아 먼 발치에서라도 광통교를 볼 수 있게 하는 방법도 있다"는 식으로 소견을 밝혔다.

그로부터 세월이 흘러 예상치 못하게 광통교는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현장 책임자는 "청계천 복원의 하이라이트라고 불러도 될 터다. 다만 사람이 밟고 다니는 다리의 바닥 돌이 유실되고 없는 게 아쉽다"고 말했다. 광통교 석재는 해체된 후 일단 경희궁 공터로 옮겨간다. 하지만 창덕궁에 보관된 광통교 난간석과 함께 본래 자리에 돌아와 원형대로 복원될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광통교야 그렇다 치고 11월 초까지 60일 일정으로 벌어질 청계천 바닥 시굴(試掘)에서는 어떤 생활 문화재들이 출토될까. 비록 거기서 찾아내는 게 조선의 자기 조각이나 오늘날의 음료수 병과 라면 봉지 등이라 할지라도 바로 그것이 우리들 삶의 원형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벌써 쓰레기 고고학의 성과가 기다려진다.

허의도 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