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8형제 홀로 키운 어머니, 가끔 무당 불러 푸닥거리

중앙일보

입력 2020.12.10 13:00

[더,오래] 조남대의 은퇴일기(4)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를 수도, 만날 수도 없다. 요양병원에 입원해 계시지만 코로나19로 인해 면회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경상도 시골에서 태어나셨다. 남아선호 사상이 심했던 시절에 첫 자식이 아들이기를 바랐는데 어머니가 태어난 것이다. [사진 pxhere]

어머니는 경상도 시골에서 태어나셨다. 남아선호 사상이 심했던 시절에 첫 자식이 아들이기를 바랐는데 어머니가 태어난 것이다. [사진 pxhere]

어머니는 경상도 시골에서 태어나셨다. 남아선호 사상이 심했던 시절에 첫 자식이 아들이기를 바랐는데 어머니가 태어난 것이다. 기대와 달리 딸이 출생하자 외할아버지는 기분이 나쁘다며 대문에 쳐 놓았던 금줄을 떼어내 돼지우리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딸이라고 목욕도 제대로 시켜주지 않아 피부가 검었던 어린 시절을 회고하던 어머니의 한 맺힌 얘기를 듣고 너무나 측은해 눈물을 삼켰다. 아무리 딸이라고 하지만 첫 자식인데 그럴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 방학을 맞아 외갓집에 가서 뵈었던 무뚝뚝한 인상의 외할아버지 모습이 떠오른다.

일제 강점기 때 기술자였던 외할아버지와 일본에 계셨던 어머니는 중학교까지 다니다 해방이 되자 귀국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혼담이 오갔다. 외갓집은 입이라도 하나 줄이자며 열여섯에 시집을 보냈다. 외갓집은 종갓집이고 먹고 사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는데도 딸이라고 그렇게 푸대접했다. 70년도 더 지난 이야기를 아직도 잊지 못하는 것을 보면 가슴에 응어리로 남아 있는 것 같다. 어린 시절의 좋지 않은 일은 평생 기억되는 것으로 보아 내가 자식 키울 때 마음의 상처 준 일은 없었는지 새삼 되돌아본다.

어머니는 시집온 지 6개월 만에 시조부 상을 치르고 7대 종부가 됐다. 아버지가 외지로 전근을 간 관계로 가장이 되어 여덟 아들을 홀로 키우면서 인부를 구해 농사를 짓고, 똥장군을 지어 나르며 밭일도 하셨다. 육체적인 고통과 의지할 곳 없는 삶의 무게로 인해 정신이 피폐해져 무당을 불러 푸닥거리를 여러 번 했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가 안쓰럽고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푸닥거리하는 것이 너무 창피해 집 밖에 있다가 끝나면 들어오곤 했다. 지금 되돌아보면 그때 어머니가 일생에서 제일 어려운 시절이었던 것 같다. 대구로 이사 와서는 동네 구멍가게에 생필품을 외상으로 가져다 쓰고는 아버지가 월급을 타면  갚아 주고 또 외상으로 한 달을 사는 일이 반복되었다. 나는 어린 마음에 그 외상값을 언제나 갚을 수 있으려나 고민을 하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아들을 모두 장가보내고 삶의 여유를 찾으려 할 때 아버지가 대장암에 걸려 병시중을 들게 됐다. 아버지는 몇 년을 투병하다 암이 담도 쪽으로 전이가 되어 하늘나라로 가셨다. 시장까지 봐 주던 자상한 지아비가 먼저 떠났을 때 그 허전하고 애닮은 심정을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으려나. 어려운 가운데에도 자식 앞에서 부부 싸움 한번 하지 않고  화목과 성실을 몸소 실천하면서 50년을 해로했지만, 짝 잃은 외기러기가 된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형님네로 가 10년을 지내다 형님이 갑자기 운명하자 아들도 없는 집에서 형수님과 또 10년을 함께 사셨다. 며느리와 둘이 함께 살기도 그리 쉽지만은 않았으리라.

치매기가 있어 더는 집에 계시는 것이 어려워 요양원으로 모셨다. 코로나19로 면회가 되지 않는 상태에서 병환이 조금씩 깊어져 다시 요양병원으로 옮겼다. 주치의는 아흔이 넘은 데다 기력이 떨어져 더는 회복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한다.

치매기가 있고 걷는 것이 어려워 더는 집에 계시는 것이 어려워 요양원으로 모셨다. 코로나 19로 면회가 되지 않는 상태에서 병환이 조금씩 깊어져 다시 요양병원으로 옮기셨다.[사진 pikist]

치매기가 있고 걷는 것이 어려워 더는 집에 계시는 것이 어려워 요양원으로 모셨다. 코로나 19로 면회가 되지 않는 상태에서 병환이 조금씩 깊어져 다시 요양병원으로 옮기셨다.[사진 pikist]

한평생 자식과 남편 뒷바라지만 하다 이젠 병원에 홀로 계신다. 면회가 안 되어 가끔 영상통화를 하면 ‘보고 싶다’는 말씀만 반복하시다 헤어질 때면 ‘건강해라’,‘고맙다’라는 말을 잊지 않으신다. 중환자실에 누워 계시면서도 자식 걱정이다. 젊었을 때는 동네에서 제일가는 미인이었고 남자 못지않게 농사일을 할 정도로 건강했지만, 세월의 무게는 당해 낼 수 없는지 침대에서 일어나질 못한다. 병실에 홀로 갇혀 자식도 보지 못하는 어머니가 불쌍하다. 병원에 찾아가 어머니를 한 번만이라도 만나게 해 달라고 떼를 쓰거나 애원이라도 해 보고 싶다. 2년 전 어머니와 장모를 모시고 보름 동안 재미있게 지냈던 것이 마지막 추억이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어머니의 삶을 되돌아보면 한 많은 인생이라는 것이 느껴진다. 8형제를 키우면서 기쁘고 즐거웠던 일도 많았을 텐데, 어렵고 고생했던 기억이 더 많이 쌓여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조속히 코로나가 물러가 어머니를 만나 도란도란 옛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해 본다.

동북아경제협력위원회 행정위원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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