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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동생 태어나자 사납게 변한 네살박이 손녀 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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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조남대의 은퇴일기(3) 

부모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한 욕망은 숨길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인 모양이다. 동생이 태어남으로 인해 그동안 독차지했던 사랑을 빼앗긴 누나는 완전히 달라졌다. 천사같이 온순하고 차분하던 성격이 거칠고 사나워졌다.

손자는 태어난 지 이제 10개월이 지났다. 지금은 주로 기어 다니다가 무엇을 잡아야 일어설 수 있는 정도다. 딸 내외가 직장에 다니는 관계로 집사람이 주로 돌봐 주고 나는 보조역할을 한다. 누나인 손녀는 네 살인데 그동안 엄마 아빠를 비롯한 어른들로부터 사랑을 독차지하다 동생이 태어나자 성격이 돌변했다. 착하고 말 잘 듣던 손녀는 장난감도 모두 자기가 차지한다. 경계를 표시해 놓고 넘어오면 “왜 누나 말을 안 들어”라며 쏘아보는 싸늘한 눈초리는 마치 용상에 앉은 임금이 포박을 당해 꿇어앉은 신하를 문초할 때와 같은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얼마 전에는 동생의 손목을 깨물어 자지러지게 울기도 했다. 물린 이빨 자국이 일주일 동안이나 지워지지 않았다.

딸 내외가 직장에 다니는 관계로 집사람이 주로 손주들을 돌봐 주고 나는 보조역할을 한다. [사진 조남대]

딸 내외가 직장에 다니는 관계로 집사람이 주로 손주들을 돌봐 주고 나는 보조역할을 한다. [사진 조남대]

그래도 할머니는 『엄마가 모르는 네 살의 심리』와 같은 육아 관련 책을 두 권이나 읽어 보고는 손녀의 비위를 맞추느라 온 신경을 곤두세운다. 심지어 남편이 첩을 얻었을 때 본처의 심정이라는 등 이야기를 하며 두둔한다. 손녀가 동생을 괴롭힐 때 내가 가끔 야단을 치면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를 혼내면 어떻게 하느냐?”면서 “책 좀 읽어 보라”고 큰소리친다.

얼마 전에는 동생이 서 있다가 넘어지면서 실수로 누나에게 부딪혔는데 “도현이가 나를 밀었어”라며 울음 섞인 목소리를 낸다. 여자의 눈물과 애교는 천부적인가 보다. 야무진 자세로 동생을 혼내는 모습을 보면 자기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동물과 별반 다름이 없는 살벌함이 느껴진다. 손녀의 행동이 사랑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힘과 협박과 애교와 눈물을 총동원한 몸부림이라는 것을 알고는 오히려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는 손녀에게 눈치를 주거나 혼내기보다는 보듬어 주고 어린아이의 심리에 관한 책도 좀 읽어 보아야겠다.

손자는 주로 내가 돌봐 준다. 벌써 몸무게가 9.8㎏이나 되기 때문에 힘이 센 나의 차지다. 품에 안으면 체온과 체취가 전해지면서 행복감에 젖어 든다. 잠투정할 때도 안아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스르르 꿈나라로 간다. 그래서 아내한테 “할아버지는 손자 잠재우는 데는 선수다”라며 칭찬을 받기도 한다. 어깨가 으쓱해지면서 빙그레 웃음이 나온다. 같은 남자라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손자 편을 많이 들어주는 것 같다. 성격이 온순하고 밥도 주는 대로 한 그릇을 금방 비운다. 구박을 받으면서도 누나와 같이 놀고 싶어서 눈치를 보며 가까이 가지만 귀찮다고 확 밀치거나 오지 말라고 고함을 지르면 멈칫하면서 애잔한 눈빛으로 쳐다본다. 그 모습을 보면 마치 ‘누나야 혼내지 말고 나랑 좀 놀아줘. 난 심심하단 말이야’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손주들을 가까이에서 돌보다 보니 아들·딸 키울 때의 기억이 어슴푸레 되살아난다.

손주들을 가까이에서 돌보다 보니 아들·딸 키울 때의 기억이 어슴푸레 되살아난다.

이제 손자도 희로애락을 아는 것 같다. 누나의 구박에 울기도 하고 조금씩 반발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보통 형보다 동생의 생활력이 강한 경우가 많은 것은 형 밑에서 살아남기 위한 본능이 발동해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지나 적응이 되다 보면 서로 간의 갈등도 조금씩 해소되면서 오누이 간의 우애가 쌓여가겠지 하는 희망을 품어본다.

자식 키울 때는 직장 일도 바쁘고 육아 경험도 없어 아이의 심정에 대해 별로 생각해 보지도 않은 채 그냥 키우기만 한 것 같다. 이제 손주들을 가까이에서 돌보다 보니 아들·딸 키울 때의 기억이 어슴푸레 되살아난다. 그때는 무조건 “오빠가 참아야지 왜 동생을 괴롭히냐”며 아들을 많이 혼냈었다. 아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고 얘기도 들어주고 맞장구를 쳐 주였으면 알아들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육아에 서툰 초보 아빠여서 그러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

지금 생각해 보면 동생이 태어나 부모의 사랑을 빼앗긴 데 대한 질투였는데 알아채지를 못했다. 그때 아들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가를 회상해보니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런 것을 다 감내하고 올바로 자라준 아들이 고맙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사랑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어린 나이에 삶의 치열한 경쟁에 뛰어든 것 같아 측은한 생각도 든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사랑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어린 나이에 삶의 치열한 경쟁에 뛰어든 것 같아 측은한 생각도 든다.

그런데 어느 날 딸과 이야기를 나누다 어릴 때 자기가 오빠보다 공부를 더 잘하고 말썽도 부리지 않았는데 오빠만 칭찬해 주고 자기는 푸대접해 마음의 상처가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 우리는 차별 없이, 오히려 딸이라고 애지중지 더 잘 해주었는데 그렇게 느꼈다니. 사랑과 관심은 부모 입장이 아니라 자식의 처지에서 생각하고 판단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 시간을 내어 아들과도 만나 성장하는 과정에서 아빠의 훈육으로 인한 응어리가 남아 있지는 않았는지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아야겠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사랑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어린 나이에 삶의 치열한 경쟁에 뛰어든 것 같아 측은한 생각도 든다. 손주의 이런 마음을 잘 헤아려 건강하고 자존감 높은 아이로 키우는 것이 할아버지의 큰 역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늘짐 없는 손자·손녀로 자랄 수 있도록 관련 책도 읽어 보고 심리도 연구하여 자식에게 하지 못한 육아를 제대로 해 보아야겠다. 나중에 손주가 자라 ‘조부모와 함께 자라서 인성이 올곧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면 더 바람이 없겠다.

동북아경제협력위원회 행정위원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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