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강대국 독일, 50년 전 ‘바르샤바 무릎꿇기’가 시작이었다

중앙일보

입력 2020.12.07 08:55

업데이트 2020.12.07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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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7일로 역사적인 ‘바르샤바 무릎꿇기’가 50주년을 맞았다. ‘바르샤바 무릎꿇기’는 1970년 당시 공산국가이자 제2차 세계대전 피해국인 폴란드를 방문한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1913~1992년, 재임 1969~1974년)가 ‘바르샤바 게토 봉기 영웅 기념물’ 앞에서 헌화를 하다가 갑자기 무릎을 꿇은 사건이다.

70년 브란트 서독 총리, 폴란드서 무릎꿇어
나치 만행 기억하는 유대인 봉기 기념탑 앞
2차대전 침략과 만행의 과거사 사죄와 반성
서독 경계하는 동유럽 주민의 경계심 녹여
동유럽권과 관계개선 추구 동방정책의 일환
나치와 단절 보여주며 동서 진영 화해 주도
1971년 노벨평화상…동·서독 기본합의서까지
국제사회 서독 인정…국제사회 축복 속 통일
21세기 독일, 경제·복지·인도주의 모범국가로
사과·반성으로 과거사 단절하는 용기 보여줘

1970년 12월 7일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폴란드 바르샤바에 있는 바르샤바 게토 봉기 기념물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생자를 추모한 현장에 2000년 30주년을 기념해 세운 조형물. 사진=위키피디아

1970년 12월 7일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폴란드 바르샤바에 있는 바르샤바 게토 봉기 기념물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생자를 추모한 현장에 2000년 30주년을 기념해 세운 조형물. 사진=위키피디아

봉기 유대인 대량 학살한 비극의 현장에서 반성

바르샤바 게토 봉기는 1943년 4월 19일부터 5월 16일 사이에 나치 점령지였던 폴란드 바르샤바의 게토(유대인 거주지)에서 유대인과 폴란드인이 벌였던 무장 저항 활동이다. 당시 나치의 진압 과정에서 독일 집계로 유대인과 폴란드인 1만3000명 이상이 숨졌으며 독일 군경의 사망자는 16명에 그쳤다.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모두 합쳐 유대인과 폴란드인 5만6065명이 죽거나 연행됐으며, 이 중 3만6000여 명은 트레블링카 등 악명 높은 강제수용소로 이송됐다. 점령지 폴란드에서 벌어진 첫 무장 봉기다. 나치가 유대인 절멸을 목적으로 벌인 홀로코스트의 일부이자 점령지 폴란드에서 벌인 잔학행위의 하나이기도 하다. 폴란드는 1948년 저항의 현장에 ‘게토 영웅 기념물’을 세웠다. 2013년 4월에는 근처에 폴란드 유대인 박물관도 설립했다.

1943년 바르샤바 게토 봉기 직후 유대인 여성과 어린이들이 강제수용소로 끌려가는 장면. 사진=독일 국립문서보관소

1943년 바르샤바 게토 봉기 직후 유대인 여성과 어린이들이 강제수용소로 끌려가는 장면. 사진=독일 국립문서보관소

50년 전 폴란드를 방문한 브란트 총리가 이곳에서 무릎을 꿇은 사건은 전 세계에 많은 감동을 주었다. 무엇보다 나치의 침략으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던 동유럽 주민들에게 전후 탄생한 신생 서독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브란트의 무릎꿇기가 나치가 벌였던 전쟁과 잔혹행위에 대한 독일인의 진정성 있는 반성과 사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1969 - 1974년 재임). 동방정책으로 동서 진영 화해와 동서독 화합의 길을 열었다. 사진=독일 국립문서보관소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1969 - 1974년 재임). 동방정책으로 동서 진영 화해와 동서독 화합의 길을 열었다. 사진=독일 국립문서보관소

브란트, 나치 박해 피해 노르웨이 망명

게다가 브란트는 나치 집권기에 청년 사회당원으로 박해를 받았으며 노르웨이로 망명했다가 노르웨이가 나치에 점령당하자 가명으로 숨어 살아야 했다. 자신이 나치의 피해자이면서도 침략의 피해국가인 폴란드에서 피해자인 유대인의 게토 봉기 영웅 기념물 앞에 무릎을 꿇은 행위는 서독 총리의ㄱ과거사 반성과 사죄에 대한 진정성을 확인하기에 충분했다.
서독 사회민주당(SPD)의 정치인으로 베를린 시장(1957~1966년)과 부총리 겸 외무장관(1966~1969년)을 거쳐 1969년 총리가 된 그는 동서냉전을 완화하는 동방정책(Ostpolitik)을 내걸고 동유럽 국가들과 수교를 추진했다. 그 전까지 서독은 1955년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1876~1967년, 재임 1949~1963년) 정권에서 발터 할슈타인 외교차관이 천명한 할슈타인 원칙에 따라 소련을 제외하고는 동독과 수교한 나라와는 국교를 맺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서독만이 독일의 유일 합법정부라는 이유에서였다.

폴란드 바르샤바에 있는 1943년 바르샤바 게토 봉기 기념물. 50년 전인 1970년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이곳에서 헌화하다 무릎을 꿇고 희생자를 추모한 현장이다. 사진=위키피디아

폴란드 바르샤바에 있는 1943년 바르샤바 게토 봉기 기념물. 50년 전인 1970년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이곳에서 헌화하다 무릎을 꿇고 희생자를 추모한 현장이다. 사진=위키피디아

차가운 동유럽 시선 녹인 무릎꿇기

하지만 동유럽 국가들의 시선을 차갑기만 했다. 2차대전의 상처가 워낙 깊었고, 나치 침략과 만행에 대한 증오가 여전히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프랑스(사망자 56만7600), 그리스(30만~80만), 영국(45만700), 미국(41만8500), 네덜란드(30만1000)가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동유럽의 타격은 특히 심각했다. 미국 국립2차대전박물관에 따르면 전쟁으로 소련은 약 2400만, 폴란드 560만, 유고슬라비아 100만, 루마니아 83만3000, 헝가리 58만, 체코슬로바키아 34만5000, 불가리아 2만5000명이 희생됐다. 가해국인 나치 독일에선 약 660만~880만,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45만 7000이 숨졌다.
하지만 브란트는 서독의 총리로서 과거 나치 시절 독일의 침략을 사죄하고 반성하는 무릎꿇기를 함으로써 동유럽인의 마음을 녹였다. 나치와 신생 서독은 다르다는 것을 보여줬다. 브란트는 무릎꿇기 직후 폴란드와 수교하고 국경선을 확정하면서 ‘동방정책’에 날개를 달았다.
그렇다면 당시 브란트는 왜 갑자기 무릎을 꿇었을까. 브란트는 “기념물 앞에 서서 추모 리본을 바라보다 헌화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담담하게 계기를 밝혔다.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사죄의 마음이 우러나오는 모습이다. 진정성 있는 사과와 반성으로 과거사와 단절하는 용기와 지혜를 보여준 셈이다. 브란트의 정치적 동지로 동방정책을 함께 설계했던 에곤 바르(1922~2015년) 총리실 동방문제 담당비서는 2010년 30주년을 맞아 했던 인터뷰에서 했던 증언이다.

1945년 독일을 점령한 미군에게 이끌려 강제수용소에 들어와 참상을 보고 있는 독일인들 나치의 잔혹상을 보여주는 것은 탈나치화의 시작이다. 사진=미국 국립문서보관소

1945년 독일을 점령한 미군에게 이끌려 강제수용소에 들어와 참상을 보고 있는 독일인들 나치의 잔혹상을 보여주는 것은 탈나치화의 시작이다. 사진=미국 국립문서보관소

독일, 탈나치화 거쳐 국제사회 복귀

사실 독일은 1945년 5월 2차대전 패배와 연합국 4개국 점령을 거쳐 4년 뒤인 1949년 5월 주권을 회복했지만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됐다. 2차대전의 재앙을 당한 유럽은 종전과 주권회복 뒤에도 동·서독 할 것 없이 독일을 불신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독일은 동·서독과 오스트리아(나치 시절 독일과 합병) 할 것 없이 1945~1950년에 걸쳐 탈나치화 작업을 벌여 정치·법조·교육·경제·사회·문화·언론 분야에서 나치 이데올로기를 제거하고 관여자를 처벌하거나 사회활동을 제한했다. 1945년 11월 20일부터 1946년 10월 1일까지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을 열어 나치 지도부와 홀로코스트나 잔학행위와 관련한 고위 장성을 처벌했다. 사회 전반적으로 나치당원이나 친위대 복무자를 공직에서 배제하거나 재교육했다.
이런 노력 끝에 서독은 1955년 미국 주도의 서방 군사동맹인 북대서양 조약기구(나토)에 가입할 수 있었지만 프랑스는 서독을 불신했다. 프랑스와 국경을 맞댄 서독 서부 자를란트를 1957년까지 점령했다가 반환했을 정도였다. 물론 여기에는 프랑스의 영토와 보상 욕심도 작용했지만, 서독을 서방 동맹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데 거부감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동유럽은 냉전과 맞물려 서독과 거리두기를 계속했다. 서독은 1950~60년대 ‘라인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뤘다. 이는 과거사와 냉전을 넘어 동서 진영의 화해를 주도할 동력이 됐다.

1945년 독일을 점령한 미군에게 강제수용소 시신처리를 명령받은 독일인 여성. 나치의 비인륜적인 죄상을 보여주는 것은 탈나치화의 시작이다. 사진=미국 국립문서보관소

1945년 독일을 점령한 미군에게 강제수용소 시신처리를 명령받은 독일인 여성. 나치의 비인륜적인 죄상을 보여주는 것은 탈나치화의 시작이다. 사진=미국 국립문서보관소

독일 아닌 나치의 만행으로 인식 전환  

빌리 브란트가 1969년에 총리를 맡으면서 동방정책을 추진했지만 동유럽의 차가운 눈길을 피하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1970년 브란트의 바르샤바 무릎꿇기로 불신 분위기가 반전됐다. 동유럽은 2차대전을 ‘독일 아닌 나치의 죄악’으로 인식을 서서히 전환하기 시작했다.
바르샤바 무릎꿇기는 너무도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다. 그 직후 독일 국내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일국의 총리가 다른 나라에서 무릎을 꿇은 일은 전례가 없기 때문이다. 당시 서독 국내 여론조사에서 무릎꿇기가 적절했다고 답한 비율은 41%였으며 48%가 과도했다는 인식을 보였다. 11%는 아무런 의견이 없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 뒤 1972년 총선에서 브란트에게 대승을 안겨줬다. 사회 복지 강화 등 내정에서 국민의 인기를 끈 이유도 있었지만 동방정책에 가속도가 붙고 동유럽과의 긴장이 풀린 것이 큰 역할을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앞서 1971년 브란트는 동서 긴장을 완화하고 화합을 추구한 공적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의 바르샤바 무릎꿇기 50주년을 기념해 지난 10월 독일 조폐국에서 발행한 시념 주화. 사진=독일 조폐국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의 바르샤바 무릎꿇기 50주년을 기념해 지난 10월 독일 조폐국에서 발행한 시념 주화. 사진=독일 조폐국

동유럽과 화해, 동·서독 화합으로 이어져

폴란드에서 시작된 서독과 동유럽의 화해는 동·서독의 화합으로 이어졌다. 동·서독은 1972년 동·서독 기본조약을 체결하고 관계를 정립했으며, 이어 1973년 동·서독 유엔 동시 가입을 이루며 국제사회에 나란히 복귀했다. 브란트의 무릎꿇기로 서독은 나치와는 단절을 전 세계에 알렸으며 명예를 회복하고 민주주의 국가로서 국가 이미지를 새롭게 정립했다.

2000년 독일 통일 10주년 기념행사에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나란히 앉은 콜 전 총리. [로이터=연합뉴스]

2000년 독일 통일 10주년 기념행사에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나란히 앉은 콜 전 총리. [로이터=연합뉴스]

서독은 1975년 서방주요7개국(G7)의 전신인 G6에 가입하며 서방 선진국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장벽 붕괴와 1990년 10월 3일 독일 통일은 우연히 오지 않았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와 부인 김소연 씨. 2018년 10월 28일 서울 그랜드 하얏트호텔에서 열린 결혼 축하연에서의 모습이다. 권혁재 기자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와 부인 김소연 씨. 2018년 10월 28일 서울 그랜드 하얏트호텔에서 열린 결혼 축하연에서의 모습이다. 권혁재 기자

통독 당시 동유럽 국가에서 ‘강력한 통일 독일’에 대한 반대가 없었던 이유는 바르샤바 무릎꿇기로 상징되는 브란트의 동방정책이 자리 잡고 있다. 이는 소련이 4개국 회담을 거쳐 독일 통일을 용인하는 원동력으로 자리 잡았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 독일인들이 기뻐하고 있다. 다음해 이뤄진 독일 통일은 빌리 브란트 총리와 전략가인 에곤 바르의 동방정책이 바탕이 됐다. 사진 독일국립문서보관소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 독일인들이 기뻐하고 있다. 다음해 이뤄진 독일 통일은 빌리 브란트 총리와 전략가인 에곤 바르의 동방정책이 바탕이 됐다. 사진 독일국립문서보관소

무릎꿇기는 독일의 통일과 유럽 주도의 초석  

통일 독일은 1993년 유럽연합(EU)과 1999년 유로존 출범의 산파 역할을 했다. 통일 총리인 기민당의 헬무트 콜(1930~2017년, 재임 1982~1998년)과 사회민주당의 게르하르트 슈뢰더(76·재임 1998~2005년)와 동독 출신 현 총리인 앙겔라 메르켈(66·재임 2005년부터)에 이르면서 독일은 유럽의 초강대국이자 주도적인 국가로 부상했다. 로 자리 잡았다. 독일은 명실공히 유럽의 경제·과학·학문·교육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독일 베를린의 칸츨러에케(총리길목) 퍼브에서 지난 2005년 갓 취임한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사진을 역대 총리 사진들 옆에 거는 장면이다. 오른쪽 위가 빌리 브란트 총리다 EPA= 연합뉴스

독일 베를린의 칸츨러에케(총리길목) 퍼브에서 지난 2005년 갓 취임한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사진을 역대 총리 사진들 옆에 거는 장면이다. 오른쪽 위가 빌리 브란트 총리다 EPA= 연합뉴스

경제를 보면 독일의 국내총생산(GDP)은 2020년 추정치로 3조7805억 달러로 세계 4위, 1인당 GDP 4만5466달러의 부자 나라다. 전국민 무상의료. 대학까지 무상교육, 삶의 질, 사회보장 등에서 세계적인 모범국가다. 2019년 기준 해외원조 238억 1000만 달러로 GNI 대비 0.60%로 세계 6위의 존경받는 자선국가이기도 하다. 오늘날 이렇게 성장한 독일이 나치와 완전히 단절된 민주국가이자 열린 나라로 전 세계에 공인을 받은 사건이 50년 전의 ‘바르샤바 무릎꿇기’일 것이다.

폴란드 바르샤바에 빌리 브란트 총리를 기억하며 명명된 '빌리 브란트 광장'의 표지. 사진=위키피디아

폴란드 바르샤바에 빌리 브란트 총리를 기억하며 명명된 '빌리 브란트 광장'의 표지. 사진=위키피디아

바르샤바에 브란트 광장, 베를린엔 빌리 브란트 공항  

폴란드는 30주년이던 지난 2000년 브란트가 무릎을 꿇은 현장에 기념물을 만들어 세웠으며 인근 광장에 ‘빌리 브란트 광장’이란 이름을 붙여 그를 기억한다. 독일도 바르샤바 무릎꿇기의 브란트 총리를 잊지 않았다. 지난 10월 31일 공식 개항한 베를린 공항에 ‘빌리 브란트’란 이름을 붙였다. 과거 베를린에 있던 쇠네펠트· 테겔 공항 등의 기능을 합친 이 공항의 정식 명칭은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빌리 브란트”(Flughafen Berlin Brandenburg "Willy Brandt")로 명명됐다. 브란트는 베를린 젤렌도로프 묘지에 묻혀있다. 브란트가 베를린 시장 시절 영빈관으로 사용하던 그뤼네발트의 건물은 2004년부터 지금까지 주독일 대한민국 대사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국 차원에서도 이곳에 브란트 기념물을 설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na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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