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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켈 이전에 브란트…존경 받는 독일 만든 진솔 리더십

중앙일보

입력 2020.12.09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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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채인택 기자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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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 국제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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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로 역사적인 ‘바르샤바 무릎 꿇기’가 50주년을 맞았다. 1970년 당시 서독(90년 통일 이전 분단 시절의 서방 진영 국가)의 빌리 브란트(1913~92년, 재임 1969~74년) 총리가 공산국가이자 제2차 세계대전 피해국인 폴란드를 방문해 ‘바르샤바 게토 봉기 영웅 추념비’ 앞에서 헌화하다 갑자기 무릎을 꿇은 사건이다.

메르켈, 코로나 나랏빚 솔직 고백
브란트, 50년 전 바르샤바 사죄
희생자 추모비 앞에 무릎 꿇어
국제적 인정과 통일의 동력으로

이 사건은 독일 지도자들이 진솔한 리더십으로 존경 받는 나라를 만든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지난 5일 대국민 연설에서 코로나 예산 증액에 따른 나랏빚을 솔직하게 고백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1970년 브란트 총리가 폴란드 바르샤바의 게토 봉기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은 현장에 2000년 세운 조형물. [AFP=연합뉴스]

1970년 브란트 총리가 폴란드 바르샤바의 게토 봉기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은 현장에 2000년 세운 조형물. [AFP=연합뉴스]

바르샤바 게토 봉기는 43년 4월 19일부터 5월 16일 사이에 나치 점령지인 폴란드 바르샤바의 게토(유대인 거주지)에서 벌어졌던 유대인 무장 저항이다. 진압 과정에서 유대인과 폴란드인 1만3000명이 숨지고 3만6000명이 트레블링카 등 악명 높은 유대인 절멸 수용소로 끌려갔다. 점령지 폴란드에서 벌어진 첫 무장봉기다. 나치의 반인륜적 범죄인 홀로코스트와 잔학행위의 현장이다. 폴란드는 48년 여기에 추념비를 세웠다.

브란트 총리가 이곳에서 무릎을 꿇은 사건은 전 세계에 감동을 줬다. 무엇보다 나치 침략 피해를 보았던 동유럽 주민들에게 서독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브란트의 무릎 꿇기가 나치 전쟁범죄에 대한 전후 독일의 진정성 있는 반성과 사과로 보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브란트는 나치 시절 사회당원으로 박해받다 노르웨이로 망명했으며 나치가 노르웨이를 점령하자 숨어 살았다. 빌리 브란트는 그때 썼던 가명이다. 본명은 헤르베르트 에른스트 카를 프람이다. 나치 피해자인 그가 폴란드의 유대인 추념비 앞에 무릎을 꿇으면서 전후 독일의 과거사 반성과 사죄의 진정성을 더했다.

43년 봉기 진압 직후 끌려가는 유대인들. [사진 독일 국립문서보관소]

43년 봉기 진압 직후 끌려가는 유대인들. [사진 독일 국립문서보관소]

브란트는 독일 사회민주당(SPD) 소속으로 베를린 시장(1957~66년)과 부총리 겸 외교부 장관(1966~69년)을 거쳐 69년 총리가 됐다. 그 뒤 동서 냉전을 완화하는 동방정책(Ostpolitik)을 펼치면서 동유럽권과 화해와 수교를 추진했다. 그 전까지 서독은 1955년 콘라트 아데나워(1876~1967년, 재임 1949~63년) 총리 정권에서 발터 할슈타인 외교차관이 천명한 할슈타인 원칙에 따라 소련을 제외하고는 동독과 수교한 나라와는 국교를 맺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서독만이 독일의 유일 합법 정부라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동유럽의 시선은 차갑기만 했다. 2차대전의 상처가 워낙 깊었고,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나치와 탈나치화 끝에 탄생한 신생 민주국가 서독을 구분하지 않았다. 하지만 브란트 총리가 무릎 꿇기로 나치와 신생 서독은 다르다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시키면서 비로소 동유럽인의 마음을 녹일 수 있었다. 서독은 폴란드와 수교하고 국경선을 확정하면서 동방정책에 날개를 달았다.

빌리 브란트

빌리 브란트

브란트는 무릎을 꿇은 이유에 대해 “추념비 앞에 서니 헌화만으론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브란트의 정치적 동지로 동방정책을 함께 설계했던 에곤 바르(1922~2015년) 총리실 동방문제 비서가 40주년이던 2010년 공개한 내용이다. 준비된 상징 조작이나 의도적으로 연출한 행동이 아니라 그야말로 마음에서 우러나온 반성과 사죄로 과거사와 단절하는 용기와 지혜를 보여줬다. 이듬해인 71년 브란트는 동서 긴장을 완화하고 화해를 추구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폴란드에서 시작된 서독과 동유럽의 화해는 동·서독의 화합으로 이어졌다. 양측은 1972년 동·서독 기본조약을 체결해 서로 주권국가로 인정했고 73년 유엔에 동시 가입해 국제사회에 나란히 복귀했다. 브란트의 무릎 꿇기로 서독은 나치와의 단절을 전 세계에 확신시키고 민주 국가로서 이미지를 새롭게 정립했다.  ‘라인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경제발전을 이뤘던 서독은 75년 주요 7개국(G7)의 전신인 G6에 가입하며 서방권의 중추로 떠올랐다.

이런 과정을 거쳐 독일은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와 1990년 10월 3일 통일을 맞았다. 통일은 우연히 오지 않았다. 통독 당시 동유럽권에서 ‘강력한 통일 독일’에 대한 반대가 없었던 배경에는 바로 바르샤바 무릎 꿇기로 상징되는 브란트의 동방정책이 자리 잡았다. 소련이 동·서독과 미국·영국·프랑스 등과 4+2회담을 거쳐 독일 통일을 용인한 바탕이기도 하다.

서독 국민은 무릎 꿇기 직후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전례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여론조사에서 ‘적절했다’고 답한 비율은 41%였으며 48%가 ‘과도했다’는 반응이었고 11%는 ‘의견이 없다’고 답했다. 하지만 서독 국민은 1972년 총선에서 브란트에게 대승을 안겼다. 사회복지 강화 등 내정에서 인기를 끈 덕분도 있었지만 동방정책에 가속도가 붙고 동유럽과의 긴장이 풀린 것이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다.

현재 독일은 여러 방면에서 존경받는다. 2020년 국제통화기금(IMF) 추정치 기준 국내총생산(GDP)이 3조7805억 달러로 세계 4위, 1인당 GDP는 4만5466달러인 경제 대국이다. 전 국민 무상의료,  대학까지 무상교육, 삶의 질, 사회보장 등에서도 모범국가다. 2019년 기준 해외원조 238억 1000만 달러, 국민총소득(GNI) 대비 0.60%로 세계 6위의 인도주의 지원 국가이기도 하다.

독일은 지난 10월 31일 공식 개항한 베를린 공항을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빌리 브란트’로 명명해 그를 기억한다. 폴란드는 30주년이던 지난 2000년 현장에 기념물을 세우고 인근 광장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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