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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쭤린 “땅은 육신이나 마찬가지, 조금도 줄 수 없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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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4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54〉

동북병공창이 만든 대포 성능 시험장에 참석한 왕융장(대포 왼쪽 첫째)과 한린춘(왕융장 옆). [사진 김명호]

동북병공창이 만든 대포 성능 시험장에 참석한 왕융장(대포 왼쪽 첫째)과 한린춘(왕융장 옆). [사진 김명호]

1916년 6월, 북양정부의 비조(鼻祖)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가 세상을 떠났다. 중국 천지가 더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42개의 군벌집단이 깃발을 날렸다. 1928년 겨울,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장제스(蔣介石·장개석)가 전국을 통일하기까지, 군인정치가와 군인이 내세운 13명이 번갈아 베이징에 군림했다. 장제스의 마지막 상대는 평소 무시하던 펑톈(奉天)군벌 장쭤린(張作霖·장작림)이었다.

작은 군벌서 수십만 군대 수장 돼 #소련·일본의 압력 속 영토 방어 #“동북 출신 군사 전문가 물색하라” #최측근 왕융장에게 은밀히 지시 #국제 무기시장 밝은 한린춘 통해 #무기·제조 장비 닥치는 대로 구매

장쭤린은 작은 군벌로 출발했다. 소련과 일본이라는 두 강국의 압력을 극복하며 최강의 육·해·공군 수십만을 양성했다. 때론 거칠고, 난폭하고, 꼴 보기 싫은 문인과 지식인처럼 외세를 대했지만 적절히 활용할 줄도 알았다. 양국이 탐내는 철도 부설과 광산 채굴권을 미끼로 묘하게 처신했다.

강국들과 곡예 외교 펼치며 군사력 증강

1차 즈펑전쟁에서 패한 장쭤린은 2차 전쟁에서 승리했다. 1924년 10월, 베이징의 장쭤린. [사진 김명호]

1차 즈펑전쟁에서 패한 장쭤린은 2차 전쟁에서 승리했다. 1924년 10월, 베이징의 장쭤린. [사진 김명호]

일본과의 우호는 자청했다. 장점은 받아들이고 이권도 내줬다. 친일파 소리 정도는 들어도 무시해 버렸다. 소련과의 곡예는 볼 만했다. 말로는 결맹을 요구하며 행동은 애매하게 했다. 두 나라가 동북의 이권을 놓고 경쟁하는 사이에 군사력을 증강했다.

토지만은 예외였다. 일화 한 편을 소개한다. 일본인들은 중국 명사들의 글씨 받기를 좋아했다. 펑톈을 방문한 일본 외교관이 장쭤린에게 붓글씨를 청했다. 장쭤린은 호랑이 ‘호(虎)’자와 ‘張作霖黑’을 일필휘지했다. 놀란 측근이 장쭤린의 귀에 입을 댔다. “墨이 맞습니다. 흙 토(土)가 빠졌습니다.” 장쭤린은 씩 웃으며 말을 받았다. “내가 아무리 무식해도 그 정도는 구분할 줄 안다. 호랑이는 동북 산속에 널려있다. 원숭이들에게 한 마리쯤 줘도 아깝지 않다. 땅은 육신(肉身)이나 마찬가지다. 촌토(寸土)도 줄 수 없다. 그래서 빼버렸다.”

1922년, 1차 즈펑(直奉)전쟁이 벌어졌다. 장쭤린이 지휘하는 펑파는 우페이푸(吳佩孚·오패부)의 즈파군에게 패했다. 펑톈으로 돌아온 장쭤린은 우페이푸의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떨었다. 세 번 암살을 기도했다. 실패하자 생각을 바꿨다. 참모들에게 참패 소감을 털어놨다.

동북병공창의 중거리포 생산라인. [사진 김명호]

동북병공창의 중거리포 생산라인. [사진 김명호]

“녹림(綠林)출신 부대는 기율이 느슨했다. 교전에서 패하면 넋을 잃고 군인 같지가 않았다. 엄격한 훈련 받은 동북강무당(東北講武堂) 출신이 지휘하는 부대는 패해도 무너지지 않았다. 그간 나는 군사학교 출신 인재들을 가볍게 봤다.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참모나 교관이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머릿속이 복잡한 애들이라 병력을 거느리게 되면 내 지시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 줄 알았다. 그 애들 엄호가 아니면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뻔했다. 불학무술(不學無術)한 교관에게 교육 받은 군인들은 믿을 수 없다. 해외에서 군사교육 받은 유학생과 군관들을 끌어모아 젊은 지휘관을 양성해야 한다.”

장쭤린은 최측근으로 자리 잡은 왕융장(王永江·왕영강)에게 은밀히 지시했다. “전국에 흩어져있는 동북 출신 중에 군사 전문가를 물색해라.” 왕융장은 무슨 일이건 대책이 준비된 사람이었다. 한린춘(韓麟春·한린춘)을 천거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 포병과를 졸업했다. 주미 무관으로 워싱턴에 있다. 술은 입에도 안 대고 여자라면 질색이다. 도박을 즐긴다는 소문이 있다.”

장쭤린은 무릎을 쳤다. “도박은 흠이 아니다. 인생은 어차피 도박이다. 전쟁은 특히 그렇다. 우리 모두 도박꾼이지 뭐냐. 당장 귀국을 종용해라. 그간 나는 숫자만 많으면 강군이라고 생각했다. 정병주의(精兵主義)에 치중할 생각이다. 동북강무당의 시설을 확충하고 일류 교관들을 초빙해라. 제 이름도 쓸 줄 모르는 군관들은 도태시켜라. 문제는 글줄은 알아도 말만 잘하는 무능한 놈들이다. 공기 좋은 곳에 가서 돼지나 키우라고 권해라.”

교육 중시하자 각 분야 인재들 물려 와

장쭤린 집권시절의 베이징 외성(外城). [사진 김명호]

장쭤린 집권시절의 베이징 외성(外城). [사진 김명호]

당시 중국은 문맹 퇴치를 위한 평민교육이 유행이었다. 왕융장은 미국 프린스턴대학교 재학 시절 아인슈타인에게 극찬받은 평민교육가 옌양추(晏陽初·안양초)를 매년 여름 동북강무당으로 초청했다. 장쭤린은 사람 홀리는 재능이 있었다. 북양정부의 고관과 각 성의 군인, 정객들이 펑톈으로 몰려왔다. 빠지는 사람도 많았지만 열 명에 두세 명은 쓸 만했다. 한린춘을 만난 장쭤린은 입이 벌어졌다. 동북병공창장에 임명했다.

한린춘은 빼어난 무기 전문가였다. 국제 무기시장 사정에도 밝았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전승국들은 패전국 독일을 철저히 짓밟았다. 독일의 세계적인 군수산업체 크루프병공창도 해체했다. 독일은 군벌 전쟁으로 날을 지새우는 중국을 주목했다. 잉여 무기를 팔기 위해 중개업자들을 상하이에 파견했다. 한린춘은 장쭤린이 준 무기 구입 자금을 들고 상하이로 갔다.

도박장 불빛이 한린춘을 유혹했다. 알거지까지 갔지만 이왕 갔으니 도박이나 실컷 하고 오라며 장쭤린이 더 보내준 돈이 2배(일설에는 4배)로 늘어나자 손을 털었다. 도박장에서 딴 돈으로 무기와 제조 장비를 닥치는 대로 구입했다. 동양 최대규모의 동북병공창 설립은 장쭤린의 혜안과, 무기천재 한린춘의 도박실력이 아니면 어림도 없었다.

장쭤린과 한린춘은 동북병공창에서 만든 엄청난 양의 무기들이 훗날 엉뚱한 곳에 쓰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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