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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기현의 철학이 삶을 묻다

“내 행위가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는 방식으로만 행동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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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불편부당한 도덕의 세계를 건축한 임마누엘 칸트

독일 화가 에밀 되르스트링의 작품 ‘칸트와 손님들’. 임마누엘 칸트가 동료들과 토론하는 모습을 담았다. [사진 위키피디아]

독일 화가 에밀 되르스트링의 작품 ‘칸트와 손님들’. 임마누엘 칸트가 동료들과 토론하는 모습을 담았다. [사진 위키피디아]

쾌감과 고통으로 어우러진 정서의 세계는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잠에서 깨어 아침의 신선한 공기를 마실 때의 쾌적함, 거실로 나설 때 풍겨오는 은은한 커피의 향은 삶에 풍미를 준다. 녹슬듯이 바래가는 초겨울의 단풍잎을 보며 쓸쓸해 하고, 가까운 사람을 떠나 보내며 슬퍼하기도 한다. 쾌감과 거리가 먼 이런 감정들마저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채색하고, 살아있음을 느끼게 한다. 감정은 선물이지만 재앙이 될 수도 있다. 때론 쾌감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고자 하는 욕망을 낳으며, 삶을 휘젓기도 하기 때문이다. 욕망의 고삐가 풀려 쾌락을 탐닉하고 눈앞의 이익에 눈멀면 개인의 삶은 나락으로 빠지고, 공동체는 공존의 장이 되지 못하고 야만으로 향한다.

감정은 도덕률의 근거가 될 수 없어 #정파적 이익 초월한 인간만이 존엄 #이기적 본능이 집단화되면 더 위험 #격 갖춘 인간으로 남을지 결단해야

욕망을 다스려야 할 이유

감정과 욕망, 과도하게 통제하면 삶이 메마르고, 방치하면 파멸을 부른다. 어떻게 감정과 욕망을 대우해야 하나?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개인적 차원에서 이 문제는 욕망을 잘 다스려 균형 있는 삶을 사는 길에 관한 질문이다. 삶의 지혜의 이야기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의 관계로 범위를 넓혀 가면, 질문은 한층 무거워진다. 왜 나는 내 멋대로 살면 안 되는가, 왜 다른 사람을 짓밟고 욕망과 본능에 따라 살면 안 되는가를 묻게 된다. 해도, 안 해도 되는 그런 처신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으로 당연히 해야 할 도리에 관한 질문, 왜 나는 도덕적이어야 하는가의 물음이다.

전통적인 권위주의 사회에서는 왜 도덕적 규범을 따라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설 자리가 없었다. 불평등한 계급이 당연시된 고대사회에서 개인은 사회의 부품이었다. 사회 존립을 위하여 마련된 윤리적 규범은 당연한 자연의 이치이어서, 내가 왜 그 규범을 따라야 하는가 묻는 것은 부적절한 것이었다. 중세는 신의 명령이 사회의 규범이어서, 이에 대하여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불경한 일이었다.

욕망과 도덕의 갈림길에 선 개인

임마누엘 칸트

임마누엘 칸트

권위주의가 소멸되고 개인이 해방되면서 경치가 달라진다. 나는 나의 삶의 주인이어서 누구도 내가 어떻게 살지를 명령할 수 없다. 개인이 해방된 세상에서 쾌락도 금욕의 족쇄에서 풀려난다. 고통을 피하고 즐거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은 더 이상 악한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쾌락이 당당히 고개를 들고, 외부로부터의 규범이 힘을 잃어가며 인간은 욕망과 도덕 사이의 갈림길에 다시 선다. 그렇다고 도덕을 저버리고 욕망만을 따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욕망을 적절히 대우하면서도 야만적 동물의 왕국으로 회귀하지 않도록 윤리적 규범을 새로이 세우는 것이 숙제로 대두되는 것이다. 개인의 해방을 맞이한 근대의 철학자들이 마주한 문제였고, 오늘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남겨진 과제다.

누군가는 욕망과 충돌하는 도덕의 근거를 처세의 연장 선상에서 찾으려 할 수 있다. 나의 욕망과 이득을 추구하기 위하여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단기적으로 나를 행복하게 할 수 있지만, 결국은 나에게 피해로 돌아올 수 있다. 영리한 개인들은 각자의 장기적 이득을 계산하여 서로의 행동을 규제하기 위한 규칙을 만들 수 있으며, 이렇게 사회적 규범과 도덕이 만들어진다는 생각이다. 인간의 감정 중에는 자신의 쾌락을 확대하고, 고통을 피하려는 이기적 욕망 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고통에 슬퍼하는 공감의 능력도 있으니, 개인의 감정을 확대하여 공존의 윤리를 찾아나가는 것에 기대는 것이 공허하지만은 않을 수 있다.

칸트는 그 길로 가지 않는다. 그는 도덕성의 근거를 쾌락과 고통, 연민이나 동정과 같은 자연적 성향에서 찾는 것을 단호히 거부한다. 쾌락과 고통의 감정은 하등 동물들에서도 나타난다. 연민과 동정은 보다 고차원적인 감정이기는 하나 이 역시 인간만이 누리는 감정이 아니다. 침팬지와 고릴라와 같은 영장류들도 공감의 능력을 갖고 있다. 칸트는 고통이든 공감이든 동물들과 함께 하는 정서의 울타리에 인간다움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 인간다움은 물리적 세계를 지배하는 동물의 왕국을 초월하여 규범의 세계를 스스로 구성하는 데에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정언명령

선의지(good will)가 동물의 왕국을 넘어서 도덕의 영역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선의지는 도덕법칙을 따르고 자신의 행위를 도덕법칙에 따라 결정하고자 하는 의지이며, 이 의지에 의하여 인격을 갖추게 된다. 사람으로서의 격이 선의지에서 온다는 말이다. 이 의지는 이익이나 행복에 대한 고려에 의하여 흔들리지 않으며, 비록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추구하는 목적에 전혀 기여하는 바가 없을 때조차도 보석처럼 빛난다.“ 인간은 자신에게 미치는 유불리를 떠나 도덕 법칙을 세우고 존중하며 복종하여 도덕적 의무를 스스로에게 부과하게 된다. 인간은 이렇게 본능을 지배하는 자연의 법칙을 넘어서 도덕의 법칙을 제정하는 자율적 존재로서 존엄하게 우뚝 선다.

"나의 행위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는 것으로 의지할 수 있는 방식으로만 행위하라.” 칸트가 숙고의 결과 제시한 도덕법칙이다. 여기에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지 않다. 다양한 가치들이 공존하는 다원적 사회에서 인간의 존엄을 구성하는 도덕원리를 특정한 내용에서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이들에게 통용될 수 있는 보편적 원리가 되기 위해서는 특정한 시대의 특정한 가치, 개인이 처한 상황과 같은 우연적 요소는 배제되어야 하기에, 그 내용은 형식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칸트는 특정한 가치관을 가지라고 말하지 않고, 당신이 어떤 원리에 따라 행위하든 그 원리가 당신의 위치나 정파성과 같은 요소를 초월하여,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권위주의가 붕괴되며 해방된 개인들이 보편적 도덕법칙을 다시 세우는 것은 시대적 도전이었고, 칸트는 이에 정면으로 응전하였다. 욕망과 도덕의 갈림길에서 욕망의 열차에 편승하지 않고, 자연적 성향을 초월하는 도덕법칙을 마련함으로써 존엄한 인간의 끈을 놓지 않았다. 칸트의 철학은 지성사적인 의미를 넘어서서 우리 삶의 깊은 구석으로 파고든다.

인간의 격을 잃어가는 한국사회

우리는 모두 자신의 즐거움을 확대하고 고통을 피하고자 하는 본능을 갖는다. 나의 즐거움과 고통은 내가 가진 것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다. 한정된 자원을 눈 앞에 두고 각자의 이익을 최대화하려다 보니, 사람들 사이의 긴장을 피할 수 없다. 때론 다른 이들의 이익을 침해하면서까지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도 한다. 이때 내부에서 경고음이 울린다. 내가 피해자의 위치에 있었더라면 원망을 했을 그런 행동은 하지 말라는 경고음이다. 경고음에 귀를 막고 얻은 즐거움은 스스로 자격이 있다는 만족감을 주지 못하고 진정한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칸트의 진단에 따르면, 염치없이 얻은 만족감이 피폐한 이유는 동물적 본능의 차원에 머물러 보편적 도덕법칙에 다다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행복은 염치를 아는 인간다움이 겸비되었을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집단화된 이기적 본능은 더욱 위험하다. 같은 이익을 도모하는 집단에 속할 때, 나의 행위는 개인적 이익이 아니라 그 집단의 공공의 선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환상을 낳는다. 그래서 다른 집단과의 관계에서 공정하지 못하고, 다른 집단의 이익을 부당하게 침해하게 되는 경우에도 개인의 이성은 마비되어 경고음을 발신하지 못한다. 집단화된 이기심이 정의의 옷을 입고 드러날 뿐, 집단을 넘어선 보편성을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한 성찰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정파적으로 분열된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칸트의 묘비에는 ‘내 위에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법칙’이라는 말이 새겨져 있다. 끝도 없이 확장하는 광대한 우주 속에서 왜소할 수밖에 없지만, 불편부당한 도덕법칙을 세우며 자연을 넘어서는 존엄한 인격으로 우뚝 서는 인간을 표현하고 있다. 쾌락이 종교화되고 이기적 집단적 본능이 공동체를 혼란으로 몰아가는 시대, 칸트는 동물의 왕국으로 회귀할 것인지, 격을 갖춘 인간으로 남을 것인지 우리에게 묻는다.

김기현 서울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