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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살 아이 떠나보낸 그 횡단보도···지금도 '일단멈춤'은 없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어린이보호구역에서 2살 아이가 희생됐는데도 보행자들에게 양보하는 운전자들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젠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는 아예 피하게 돼요.”
24일 광주광역시 북구 운암동의 한 아파트 단지 정문 앞 횡단보도에서 만난 주민 이모(54)씨가 ‘어린이보호구역 일가족 참변’ 뒤 일주일 만인 24일 사고현장을 찾은 취재진에게 한 말이다.

광주 스쿨존 일가족 참변 뒤 일주일…여전히 불안한 주민들 #“양보 운전자 본 적 없어…신호등 있는 횡단보도로 돌아가야” #신호등 설치 대책에도 주민들 “운전자 못 믿어 횡단보도 없애자”

여전히 보행자 안전 위협하는 차량들

24일 광주광역시 북구 운암동 아파트 단지 앞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를 한 차량이 지나가고 있다. 지난 17일 이곳에서 교통사고로 2살 아이가 숨지고 30대 어머니와 4살 아이가 중상을 입었다. 프리랜서 장정필

24일 광주광역시 북구 운암동 아파트 단지 앞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를 한 차량이 지나가고 있다. 지난 17일 이곳에서 교통사고로 2살 아이가 숨지고 30대 어머니와 4살 아이가 중상을 입었다. 프리랜서 장정필

지난 17일 오전 8시 45분 이곳 횡단보도에서 교통사고로 2살 아이가 숨지고 30대 어머니와 4살 아이가 중상을 입었다. 어린이보호구역에서 일어난 사고였다.

사고 당시를 기록한 CCTV에서는 한 손에 아이의 손을 붙잡고 또 다른 손으로 유모차를 붙잡은 어머니가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 중간에 위태롭게 갇힌 모습이 담겨 있었다.

인근 아파트 주민들은 끔찍한 참변이 있은 뒤로 사고지점 횡단보도 대신 30m 떨어진 사거리의 ‘신호등 있는 횡단보도’만 이용한다고 한다. 일가족 참변이 일어난 횡단보도는 신호등이 없어 운전자들의 양보가 없으면 길을 건널 수 없는 위험한 곳이지만, 아파트 단지 정문 앞에 있어 급한 일이 있는 주민들은 종종 이용했었다.

중앙일보 취재진이 이 횡단보도를 이용해 반대편으로 건너가 봤다. 횡단보도 중간까지 걸어나와 있었는데도 일단 멈춤 없이 속도를 높여 지나치는 운전자들이 다수였다. 횡단보도 시작점에서 건너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에도 차를 세우는 운전자는 없었다. 한 차량은 횡단보도 앞에서 경적을 울리면서 속도를 높여 지나가기도 했다.

“운전자 못 믿어” 횡단보도 없애자는 주민들

24일 광주광역시 북구 운암동의 한 아파트 단지 앞 횡단보도에 교통사고로 숨진 2살 아이와 중상을 입은 일가족을 추모하는 손 편지가 남겨져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24일 광주광역시 북구 운암동의 한 아파트 단지 앞 횡단보도에 교통사고로 숨진 2살 아이와 중상을 입은 일가족을 추모하는 손 편지가 남겨져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한 주민은 “그렇게 큰 사고가 나면 운전자들이 조심하겠거니 싶었는데 언론사 기자들이 카메라 들고 북적거릴 때만 조심하다가 이제 다시 쌩쌩 달리던 예전으로 돌아갔다”며 “이곳 횡단보도를 아예 없애버려야 한다는 말이 왜 나오겠느냐”고 했다.

사고 발생 사흘 뒤인 지난 20일 광주시 시민권익위원회가 아파트 단지 정문 앞 횡단보도 개선을 위한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안전 대책으로 신호등을 설치하자는 안이 나왔는데 주민 다수가 찬성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반대 의견도 거셌다. 신호등을 설치해도 운전자들이 30m 떨어진 사거리 신호를 통과하려고 과속으로 달리거나 신호 위반을 하는 일이 잦을 거란 불안감 때문이었다. 아예 횡단단보도를 없애자는 쪽도 많았다. 시민권익위는 결론을 못 내리고 주민 의견을 재취합해 신호등 설치를 검토하기로 했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24일 광주광역시 북구 운암동의 한 아파트 단지 앞 횡단보도를 인근 주민이 건너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24일 광주광역시 북구 운암동의 한 아파트 단지 앞 횡단보도를 인근 주민이 건너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2살 아이가 떠난 사고현장 주변에는 흰 국화꽃 한 송이와 함께 손편지가 남겨져 있다. 어린 고사리손으로 쓴 듯 삐뚤빼뚤한 글씨의 편지에는 “아가야. 하늘에서 잘 지내고 있니? 이제는 아프지 마”란 글이 적혀 있었다.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버린 아이의 모습을 담은 듯한 그림도 있었다.

또 다른 편지 한쪽에는 중상을 당한 아이의 쾌유를 바라는 글이 적혔다. 아파트 주민들은 “사고를 당한 일가족의 지인들이 남긴 것 같다”고 했다.

24일 광주광역시 북구 운암동 아파트 단지 앞 횡단보도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일가족을 추모하는 조화와 손편지가 남아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24일 광주광역시 북구 운암동 아파트 단지 앞 횡단보도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일가족을 추모하는 조화와 손편지가 남아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이 편지에는 “거기서는 아프지 말고 행복하게 좋은 곳으로 가. 아가야”라는 글이 담겼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다시 태어나면 오랫동안 이 세상에서 사랑 많이 받고 살아야 돼. 세상에서 제일 예쁜 아가야. 엄마랑 언니 꼭 지켜봐 줘. 꼭 지켜 줘”라는 대목도 있었다.

이번 교통사고 건을 수사한 광주 북부경찰서는 2살 여아를 숨지게 하는 등 3명의 사상자를 낸 혐의(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치사 등)로 구속된 화물차 기사 A씨를 24일 오전 검찰로 송치했다. 이와 함께 횡단보도에 멈춰선 아이와 어머니를 보고도 멈추지 않고 주행한 운전자 4명에게 범칙금 부과를 위한 출석 요구서를 등기 발송했다. 경찰 관계자는 “횡단보도에서 ‘일단 멈춤’을 하지 않은 운전자들도 책임이 있다. 다만 처벌 수위는 과태료나 범칙금 부과가 한계다”고 말했다.

현재까지 경찰에 출석하거나 과태료를 납부한 운전자는 없다. 출석 요구는 강제 사항이 아니기 때문이다. 경찰 관계자는 “출석 기간을 2주 내로 지정해 통보했지만, 아직 출석하거나 과태료를 납부한 운전자는 없다”며 “출석하지 않아도 과태료 20만원만 내면 종결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광주광역시=진창일 기자 jin.changi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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