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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주정은 질병"… 사회도 함께 병든다

중앙일보

입력

한국식 음주문화는 '취할 때까지 마신다'로 거의 정착돼 있다. 술에 목숨을 거는 분위기다. 남자건 여자건 술을 따라마시지 못하면 사회적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평가되는 세계에서 드문 나라다.

술에는 항상 강요가 따르며 그 결과는 당일과 다음날의 사회 활동 및 가정 내 역할을 모두 망치는 것으로 나타난다. 적잖은 경우 싸움으로 인간관계마저 황폐화시킨다. 가정파괴를 부르기도 한다.


폭음 문화는 또 속병이나 간 질환 등을 통해 개개인의 건강을 해칠 뿐만 아니라 사회의 건강을 병들게 한다. 한국인의 건강수명.평균수명을 선진국 대비 몇년씩 낮추는 주범이 술이다. 폭음은 또 음주운전이나 교통사고 등으로 사회적 비용을 가중시킨다.

그러나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선진국의 술 문화는 전혀 다르다. 몇잔의 술로 스트레스를 풀고 식사 자리를 즐겁게 하는 역할을 한다. 또 가벼운 술로 혈액순환 등을 촉진시키는 건강 기능을 겨냥하기도 한다.

현재 우리의 술 문화는 우리 조상들의 전통과도 아주 멀어져 있다. 우리 조상들은 문화와 풍류의 하나로 절제된 가운데 술을 즐겼다.

한국의 문화는 술 주정을 관대하게 받아준다. '남자가 술 마시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용인하는 분위기인 것이다. 하지만 음주로 인해 사회와 가정생활에 상당한 지장을 받는다면 그것은 의학적으로 알콜 중독으로 분류된다.

여기서 말하는 중독이란 '술을 마시지 않으면 견딜 수 없고(금단 증상), 술을 찾는 횟수와 양도 점점 증가하며 사회활동을 포기한 폐인'의 지경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술로 인해 인간관계와 업무에 지장을 받는다면 그 사람은 알콜 중독자라는 게 의학적인 정의다. 오른쪽의 '알콜 중독 자가진단표'가 이를 뒷받침한다. 이에 따르면 한국 성인 남성의 40% 가량이 중독으로 분류되는 것이다.

서울대 의대 이정균 교수팀의 국내 알콜 중독자 비율(성인 남녀의 21.7%)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분석은 '폭음 대국'인 한국의 위험한 성적표다.

보건복지부가 올 2월 발표한 조사(전국 성인 6천여명 대상)에서도 알콜 중독자의 비율이 16.3%로 나타났다. 1984년 조사와 비교하면 여성 중독자의 급증이 눈에 띈다.

남성 중독자가 42.8%에서 25.8%로 줄어든 반면 여성 중독자는 2.2%에서 6.6%로 늘었다. 두가지 조사 모두 미국 정신의학회가 제정한 알콜 중독 기준(DSM)을 적용한 것이다.

이 기준은 ^흥분 등 효과를 얻기 위해 주량이 점점 늘어나는 경우^술을 끊기 위해 계속 노력해도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 등 11가지다.

문제는 대부분의 중독자가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전북대 사회복지학과 윤명숙 교수는 "당사자들이 문제를 인식해 상담 등 전문적 치료를 받기까지 평균 6년이 걸린다"고 밝혔다. 이들은 대부분 음주운전 사고와 가정 불화, 실직이나 파산 등 파국을 맞은 뒤라야 상담소나 병원을 찾는다.

의학적으로 술(알콜)은 담배(니코틴)보다 덜 해롭긴 하다. 96년 미국 하버드 보건대학원의 조사 결과 술 탓에 사망하는 비율보다 흡연 탓에 사망하는 비율이 4배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신체적 불구나 정신적 장애 등 후유증이란 측면에선 술이 담배에 비해 3배나 피해가 컸다. 술 자체보다 과음 후 뒤끝으로 인한 후유증이 담배보다 크다는 의미다.

영동세브란스병원 정신과 남궁기 교수는 "술에 취해 소동을 부려 가족이나 동료로부터 충고를 들은 경험이 있다면 알콜 중독이 싹트고 있는 조짐"이라며 경각심을 가지라고 역설했다.

필름이 끊겨 고주망태가 되는 일이 반복된다면 의학적 조치가 필요하다. 남궁교수는 "주사(酒事)는 술버릇이 아니라 치료가 필요한 뇌의 질환(중증 알콜 중독)"이라고 못박았다.

알콜 중독은 후천적 학습의 결과라기보다 알콜 분해효소의 능력과 술에 대한 대뇌의 반응도 등에 의해 생물학적으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한국처럼 음주에 관대한 환경은 이들 대부분을 알콜 중독자로 내몬다.

중독자에겐 술을 줄이는 게 아니라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요구된다. 전문가의 상담 치료는 물론 아캄프로세이트나 날트렉손 등 약물치료를 받는 것이 좋다.

가족의 역할도 중요하다. 알콜 중독이 좀처럼 뿌리뽑히지 않는 것은 가족이 중독자에게 관대하게 대하는 탓이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한국알콜약물상담소 민호기 소장은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지 않기 위해선 처음부터 단호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술에 취해 생긴 불상사는 전적으로 자신이 책임지도록 해야 하며 가족들이 떠맡아선 안된다는 것. 섣부른 용서는 가족에 대한 심리적 의존을 초래해 더욱 증세를 악화시킨다.

閔소장은 "술을 끊지 않으면 별거나 이혼을 불사하고 경찰에 격리보호를 요청하는 등 처음부터 강경한 태도를 보인 가족인 경우 치료 성공률이 훨씬 높다"고 말했다.

이처럼 우리 사회는 알콜 중독자가 많아졌고 치료가 시급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를 부추긴 것은 '술 권하는' 사회의 관행이다. 대안은 '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대화와 분위기를 '즐기기 위해서' 마시는 것으로 발상을 전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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