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정TV·반도체·스마트폰…이 회장엔 시대 읽는 눈과 결단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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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1942~2020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오른쪽 둘째)이 생전인 2004년 선진 제품 비교전시회에서 디지털TV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왼쪽은 이학수 당시 부회장, 오른쪽은 최지성 당시 사장. [사진 삼성전자]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오른쪽 둘째)이 생전인 2004년 선진 제품 비교전시회에서 디지털TV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왼쪽은 이학수 당시 부회장, 오른쪽은 최지성 당시 사장. [사진 삼성전자]

미타라이 후지오(御手洗富士夫·85) 캐논 회장은 26일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시대의 흐름을 읽는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일본 경제인연합회(게이단렌) 회장을 지낸 미타라이 회장은 이 회장과 30년 가까이 교류해 온 대표적 일본 인맥이다.

미타라이 후지오 캐논 회장 #10년 전 승지원서 열띤 토론 생생 #내가 게이단렌 회장 맡았던 기간 #삼성, 소니 제치고 가전 세계 1위

그는 10여 년 전 이 회장과 디스플레이 사업의 미래에 대해 열띤 토론을 했던 일을 떠올리며 “지금도 그날 저녁 나눴던 대화를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다음은 미타라이 회장과의 전화 인터뷰 내용을 기자가 정리한 것이다.

고 이건희 회장은 시대의 흐름을 읽는 선견지명이 있었던 사람이다. 상당히 조용하고 부드러운 분이었지만 굉장히 우수한 리더십과 카리스마가 있었다. 처음엔 가전으로 삼성전자의 이름을 세계에 알렸고, 1990년대에는 ‘선택과 집중’을 통해 액정 TV로, 이후엔 반도체 분야를 육성했고, 지금은 스마트폰으로 우뚝 섰다. 삼성전자를 세계적 기업으로 만든 이 회장을 대단히 존경한다.

10여 년 전 이 회장과 디스플레이 시장의 미래에 대해 열띤 토론을 나눴던 그날 저녁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이 회장이 갑자기 서울에 있는 삼성의 영빈관인 승지원으로 나를 불렀다. 나는 한걸음에 도쿄에서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날아갔다. 당시 디스플레이 분야는 액정·플라스마·SED(표면전도형 전자방출디스플레이) 등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아직 전략적으로 어느 것이 가장 좋은지 모르는 상태였다. 경쟁업체인 소니나 파나소닉도 마찬가지였다.

이 회장은 나에게 여러 의견을 물었고, 나는 당시 “액정 기술에 다소 의문은 있지만 (액정TV가) 비용 측면에선 유리하다”는 생각을 말씀드렸다. 이 회장은 나와 의견이 일치했다. 이 회장은 당시 말씀을 많이 하진 않았지만 통역 없이 일본어로 대화를 나눴던 걸로 기억한다.

미타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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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1시간 가까이 이어진 대화에서 이 회장은 삼성의 미래산업을 액정TV로 정한 것 같았다. 이후 과감한 대규모 투자가 이어졌고, 삼성은 액정TV로 세계 1위가 됐다. 이 회장과의 대화 중 판단의 정확함, 즉 결단력에 상당히 놀랐다.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었겠지만 결정은 스스로 내렸다. 그런 점에서 시대의 흐름, 기술의 흐름을 잘 아는 선견지명이 있었던 사람인 건 틀림없다.

마침 내가 게이단렌 회장을 맡은 기간(2006~2010년) 중 가전 부문에서 삼성이 소니를 제치고 세계 1위 자리를 차지했다. 일본에서도 삼성의 경영방식은 상당한 화제가 됐다. 이 회장은 하나씩 하는 게 아니라 거대한 자본을 배후로 큰 결단력을 갖고 회사를 크게 바꿔나갔다. 사고방식의 스케일이 대단히 크고 다이내믹했다. 나를 비롯한 일본의 많은 경영인이 그런 방식을 상당히 존경했다. 이 회장도 일본과의 관계를 대단히 중요하게 여겼다.

아쉽게도 이 회장의 건강이 악화해 10여 년 전 만남이 마지막 교류였다. 이후 이재용 부회장과는 여러 번 만나 교류를 계속하고 있다. 2019년엔 내가 조직위원장을 맡았던 럭비월드컵 경기에 이 부회장을 초청하기도 했다. 이 부회장이 경영자로서 훌륭하게 성장한 만큼 이 회장도 안심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 회장이 남긴 가장 큰 레거시(유산)는 역시 시대를 읽는 눈과 결단력이라고 생각한다. 이 회장이 건강을 회복해 꼭 다시 만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한 것을 정말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도쿄=윤설영 특파원 snow0@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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