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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태옥 “지구 살리는 옷 입히고 싶다, 블랙핑크 연락하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6면

데뷔 55주년을 맞은 진태옥 패션 디자이너가 브랜드 ‘래코드’와 협업한 리사이클 패션 전시. 견고한 디자인의 남성재킷과 부드러운 벨벳을 조합시켜 특유의 중성적 감성을 표현했다. 우상조 기자

데뷔 55주년을 맞은 진태옥 패션 디자이너가 브랜드 ‘래코드’와 협업한 리사이클 패션 전시. 견고한 디자인의 남성재킷과 부드러운 벨벳을 조합시켜 특유의 중성적 감성을 표현했다. 우상조 기자

한국을 대표하는 1세대 패션 디자이너 진태옥(86). 요즘 그가 푹 빠진 일이 있다. 바로 패션 리사이클 작업이다.

86세 거장의 새 꿈 ‘리사이클 패션’ #재킷 해체·재조합하며 행복감 #“썩지도 않는 수백만 벌 재생운동 #K팝 스타들 함께하면 파급력 클 것”

“전 세계에서 수백만 벌의 옷이 새로 만들어지고 또 그만큼 버려지고 있어요. 지구를 살리기 위해 패션 디자이너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 중입니다.”

진 디자이너는 코오롱FnC의 브랜드 ‘래코드(Re;code)’와 협업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래코드는 자사 내 재고 의류들을 해체한 후 재조합해 전혀 색다른 제품을 만들어내는 업사이클링 브랜드다. 지난 2월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 초청받아 진 디자이너와 함께 ‘아카이브’ 프로젝트를 준비했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전시가 취소되면서 서울 이태원의 남성복 매장 ‘시리즈코너’로 전시 공간을 옮겼다.

“처음 함께하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는 낯설지만 해볼 만하다 생각했어요. 있는 옷 뜯어서 이리저리 다시 붙이면 되겠지 했는데 아니더라고요. 면도칼로 청재킷 하나를 해체하는 데 온종일 걸리는 거예요. 어느 순간 ‘내가 얼마나 바쁜 사람인데 이걸 뜯고 있나’ 짜증이 나더라고요. 하하.”

올해로 데뷔 55년째인 백전노장은 “결국 청재킷 해체는 너무 어려워서 포기했다”며 “훈련을 더 해서 다시 도전하겠다”고 했다. 그가 이번 프로젝트를 위해 주재료로 선택한 건 검은색 남성재킷과 검정·파랑 벨벳이다. “견고한 분위기의 남성재킷에 부드러운 벨벳 소재를 얹어서 극과 극의 감성을 만나게 한 거죠.”

무거운 코트 재킷의 옆단을 터 A라인의 흰색 셔츠를 붙이고, 심플한 라인의 검정 재킷에 벨벳 리본과 술 장식을 달았다. 남성과 여성, 그 극단 사이 어디엔가 존재하는 중성의 느낌. 진태옥 디자이너가 평생을 천착해온 주제다. 말씨와 행동은 소녀 같지만 평소 옷차림과 디자인에선 강한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진 디자이너다운 콘셉트다. 그의 작품 10개는 이달 말까지 전시·판매되며 내달엔 중국의 유명 패션 편집숍이자 복합문화공간인 ‘더리퍼블리크’의 초청으로 청두에서도 전시된다.

그는 옷을 해체하고 다시 조합하는 과정에서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전율과 행복을 느꼈다고 했다.

“재킷 소매를 툭 뜯었을 때 안감·심지·계심지 등의 속살이 한꺼번에 주르륵 드러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옷과 대화를 하고 있더라고요. ‘얘, 넌 너무 예쁘게 생겼다’라고 말이죠. 하하. 그렇게 한 조각씩 자르고 특징을 관찰하면서 퍼즐을 맞추듯 새 옷을 만드는 과정이 너무 재밌었어요.”

늦은 나이 제2의 인생 주제로 고민할 만큼 리사이클 작업에 빠졌다는 진 디자이너는 “K팝 스타들이 한국 디자이너가 만든 리사이클 옷을 입고 무대에서 공연하는 걸 보는 게 꿈”이라고 했다.

“지구 전체를 몇십 겹 에워싸고도 남을 만큼의 옷이 버려져 땅에 묻히는데, 썩지도 않아요. 리사이클 패션은 전 세계 인류의 숙제입니다. 누군가는 이 심각성을 큰 목소리로 알려야죠. 저 같은 디자이너 한 명의 힘으론 어렵겠지만 BTS·블랙핑크 같이 영향력 있는 가수들이 함께 글로벌 캠페인을 벌인다면 파급력이 크겠죠. 사실 내 머릿속에는 이미 블랙핑크 멤버들에게 어떤 옷을 어떻게 입힐지 다 계획이 서 있어요. 이제 연락만 오면 되는데. 하하.”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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