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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오래 된 위스키 바의 기울어진 목재 테이블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김대영의 위스키 읽어주는 남자(90)

몇 년 전, 홍대 어느 바의 바텐더가 이런 말을 했다.

“오래된 바에 가면 바 테이블의 기울기를 먼저 살핍니다. 자세히 보면 손님이 앉아있는 쪽으로 약간 기울어있거든요. 바 테이블을 거쳐 간 손님들의 무게가 그렇게 만드는 겁니다.”

이 말을 들은 뒤로 목재 바 테이블에 앉을 때면 바의 기울기를 본다. 대부분 평평한데 가끔 내가 앉은 쪽으로 테이블이 기울어있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이런 테이블 위에 두 팔을 올려놓으면 바를 거쳐 간 수많은 이들의 흔적 같은 게 느껴진다. 어떤 사람이 다녀갔는지, 왜 다녀갔는지, 바텐더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추억 위에 또 다른 추억이 겹쳐 만든 무게가 바를 기울게 한 건지도 모른다.

홍대 어느 bar의 오래된 바테이블. [사진 김대영]

홍대 어느 bar의 오래된 바테이블. [사진 김대영]

얼마 전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이가 운영하는 바에 다녀왔다. 그날이 바의 마지막 영업일이었다. 새로운 도전을 위해 바 영업을 종료하는 그를 응원하려고 찾아갔다. 착석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자리는 만석. 처음엔 서로 모르는 손님이었지만, 바에서 안 이들은 술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결코 집에서 마실 수 없는 바 안의 공기가 술의 맛과 향을 끌어올리는 것 같았다.

한 손님이 이런 말을 했다. “이제 여기 없어지면 어떡하나요. 회사가 바로 앞이라 저한테는 너무나 소중한 공간이었는데.”

아쉬움 가득 담긴 그의 말에 십분 공감했다. 서른 넘게 살면서 소중했던 공간이 사라지는 모습을 너무 많이 봐왔다. 나고 자란 곳은 재개발되어 사라졌다. 자주 다니던 식당이나 술집도 거의 남지 않았다. 추억은 머릿속에 그대로지만, 그 추억을 되새길 수 있는 공간은 이제 없다. 소중한 나만의 공간을 다시 찾기란 얼마나 힘든 일인지. 나이가 들수록 더 힘들어지는 건 나 혼자만인가.

2020년 10월 15일을 끝으로 폐업한 여의도의 어느 bar의 테이블. [사진 김대영]

2020년 10월 15일을 끝으로 폐업한 여의도의 어느 bar의 테이블. [사진 김대영]

올해는 코로나19 확산으로 폐업하는 술집과 음식점이 크게 늘었다. 거리를 지나다 보면 텅 빈 가게에 ‘임대 문의’만 붙어있는 곳이 허다하다. 소중한 공간을 잃어버린 이들의 한숨도 덩달아 늘어났을 것이다. 생업을 잃고 실의에 빠진 자영업자 숫자도 그 한숨에 비례한다. 날씨가 추워지면서 한숨은 하얀 김이 됐고, 이제 우리 눈에 더 잘 보인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테이블을 살짝 기울게 만들었던 좋은 추억들을 떠올리면 힘이 난다. 코로나19가 사라지고 더 많은 테이블이 기울어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

위스키 인플루언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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