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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든 동안 내 신체 찍혀도…"나중에 지울줄 알았다" 안통했다

중앙일보

입력

가수 고(故) 구하라씨를 폭행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전 남자친구 최종범이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항소심 선고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뉴스1]

가수 고(故) 구하라씨를 폭행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전 남자친구 최종범이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항소심 선고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뉴스1]

 지난 15일 협박ㆍ카메라 등 이용촬영죄 등의 혐의 등으로 기소돼 재판은 받던 최종범(29)씨의 징역 1년형이 확정됐다. 최씨는 가수 고(故) 구하라씨의 전 연인이다. 2018년 여름 두 사람의 다툼과 경찰 신고로 시작된 법정 싸움은 구씨가 사망 1년 뒤에야 마무리됐다. 대법원은 하급심과 마찬가지로 ‘불법 촬영’ 부분은 무죄로 판단했다.

최씨 재판에서 문제가 된 사진은 총 6장이다. 구씨의 뒷모습과 다리 등이 포함된 6장의 사진을 두고 구씨측은 일관되게 “사진을 찍는 데 동의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법원은 "여러 정황을 살폈을 때 구씨가 명시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최씨가 구씨 의사에 반해 사진을 찍었다고도 단정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두 사람 사이 ‘묵시적 동의’가 있었다고 본 거다.

법원은 그 이유로 ▶구씨가 사진 촬영음이 들렸지만 제지하지 않았고 ▶구씨도 이 무렵 비슷한 최씨의 사진을 찍은 적이 있으며 ▶최씨 휴대전화에서 다른 영상은 지운 구씨가 해당 사진은 지우지 않은 점을 들었다.

구씨측은 동영상은 지우고 사진은 남긴 상황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당시 구씨는 최씨가 잠시 화장실을 간 사이 동영상부터 급하게 지웠다고 한다. 상대방 휴대전화에 남은 사진·영상을 짧은 시간 찾아 지우는 게 재판부 판단처럼 쉽지만은 않았다는 주장이다.

구씨 유족의 변호를 맡은 노종언변호사(법무법인에스)는 "사진을 본 즉시 항의하지 않고 '나중에 지우려고했다'는 주장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라며 "많은 경우 연인 관계에서 맞아도 즉시 항의하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인데, 이런 특수성을 고려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고 밝혔다.

“나중에 지우려고·지울 줄 알았다” 안 통한다

[중앙포토·연합뉴스]

[중앙포토·연합뉴스]

“관계를 생각해 나중에 지우려고 했다”는 구씨측 주장은 구씨에게만 한정된 건 아니다. 비슷한 주장은 연인 간 촬영이 문제 된 사건에서 종종 등장한다. 지난해 4월 대구지법 서부지원은 연인 A(여)씨의 나체를 동영상 촬영한 B씨에 대해 무죄로 판단했다.

B씨는 나체인 A씨에게 휴대전화를 들이대며 촬영했고, A씨는 “하지마” “찍지마”라고 3~4차례 거부 의사를 표시했다. 그런데도 B씨는 촬영을 이어갔고 결국 A씨는 B씨의 요구에 응하며 일부 포즈를 취하게 된다.

B씨 사건을 맡은 1심은 “이 촬영 이후 두 사람은 성관계를 가졌다”라며 촬영 후 정황을 B씨 무죄의 근거로 댔다. 촬영 직후나 성관계 이후에 피해자가 동영상 삭제를 요구하거나 적극적으로 항의하는 등 특별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법원은 “A씨가 계속되는 B씨의 촬영에 명시적으로 거부 의사를 밝혔다고 보기는 어렵고, A씨가 언제든지 B씨 휴대전화에 접근해 사진을 지울 수 있다고 생각해서 이 촬영에는 묵시적으로 동의한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당시 피해자 A씨는 “B씨가 ‘증거를 남기지 않겠다’‘나중에 지우겠다’는 말을 평소 해왔다”고 주장했다. B씨가 평소 사진을 찍어도 지운다고 했기 때문에 당연히 영상을 지웠을 거라고 생각했다는 취지다.

지워진 줄 알았던 영상의 존재가 떠오른 건 두 사람의 이별 뒤였다. A씨가 B씨에게 “빌려준 돈을 돌려달라”는 민사 소송을 내자 B씨가 A씨의 동영상을 캡쳐해 ‘연인이었음’을 증명하는 증거로 법원에 낸 것이다. 삭제한 줄 알았던 영상이 보관돼 있고, 재판에 증거로까지 제출되자 A씨는 B씨를 카메라 등 이용 촬영죄로 고소했다. 법원은 이 점에 대해서도 “당시 촬영을 문제 삼았다기보다는 이후 동영상이 유포될 것을 우려한 것으로 보인다”며 B씨가 A씨의 의사에 반해 동영상을 찍은 거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이 판결은 항소심에서도 그대로 인정돼 확정됐다.

“평소 비슷한 사진 찍지 않았느냐” 불리한 정황 되기도

만약 연인 사이 신체 사진이나 사생활 동영상 등을 자주 촬영해왔다면 특정 사진을 두고 카메라 등 이용 촬영죄를 묻기는 더욱 어려워질 수 있다. 연인간 촬영이 문제 된 대다수 사건에서 ‘묵시적 동의’가 있었음을 주장하는 피고인 측은 “평소 이런 사진을 찍어왔기 때문에 이 촬영도 마찬가지라 생각했다”는 주장을 펴기 때문이다.

지난해 5월 수원지법 성남지원에서도 잠든 연인의 나체를 촬영한 C(남)씨가 재판에 넘겨졌다. C씨와 D씨는 평소 휴대전화 비밀번호를 공유했는데 C씨의 휴대전화 사진을 보던 D씨가 몇 개월 전 자신도 모르게 찍힌 자신의 사진을 발견해 문제 삼은 것이다. “이 사진은 뭐냐”는 D씨의 추궁에 C씨는 되려 “이 촬영이 뭐가 문제냐”는 식으로 답했다. 평소 두 사람은 자주 사진 촬영을 해왔다. C씨는 “평소에는 오히려 내가 촬영을 당하다가 어쩌다 내가 찍은 것인데 왜 이 사진만 문제 삼느냐”고 주장했다.

법원도 C씨 주장을 받아들였다. 법원은 “피고인은 자신과 성관계 후 잠든 피해자의 신체를 촬영하는 것이 피해자와의 관계에서 용인되는 것으로 여겼다고 보인다”고 인정했다. C씨는 1심에서 무죄를 받았고, 2심에서 확정됐다.

성범죄 피해자들을 대리해온 이은의 변호사는 “사건마다 상황이 다르겠지만, 과거 동의하에 촬영한 사진ㆍ영상이 있다는 점이 피해자에게 불리한 정황으로만 적용된다면 문제”라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의사에 반하는지 아닌지를 명확히 추단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결국 피고인의 관점에서 이를 바라볼지, 피해자의 관점에서 바라볼지를 결정하는 게 재판부”라고 지적했다.

이수정 기자 lee.sujeo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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