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지난 8일(한국시간)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 선거 최종 라운드에 진출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소식이 전해지자 유 본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어려운 여건에서 선전했다.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말했다. 1995년 김철수 전 상공부 장관, 2013년 박태호 전 통상교섭본부장이 WTO 사무총장 선거에 나선 적이 있지만 한국인으로서 최종 결선 진출자는 유 본부장이 처음이다.
문 대통령은 유 본부장이 WTO 사무총장 출마를 발표한 뒤 WTO 회원국 정상과 통화할 때마다 유 본부장 지지를 당부했다. 브라질·독일·러시아·호주·뉴질랜드 정상과의 통화에서다. 문 대통령은 지난 1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통화하며 유 본부장을 “오랜 통상 분야 경력에 따른 경험과 전문성을 가진 만큼 WTO 발전 및 다자무역체제의 신뢰를 회복시킬 수 있는 최적임자”라고 소개했다. 문 대통령은 지난달 청와대 내부 회의에서 유 본부장을 위한 “전방위적 지원을 아끼지 말라”고 지시했다.
유 본부장을 위한 문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은 노무현 정부 때 경험이 바탕이 된 것으로 보인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반기문 당시 외교부 장관을 유엔(UN) 사무총장으로 선출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결국 첫 한국인 유엔 사무총장이 탄생했다. 문 대통령은 자서전 『문재인의 운명』에서 “참여정부는 그때(반 전 총장이 후보로 결정된 때)부터 ‘할 수 있는’ 외교적 노력을 다했다. 대통령은 모든 순방외교에서 그의 지지를 부탁했다”고 썼다.
노 전 대통령은 지지 부탁을 위해 한국 대통령이 한 번도 찾은 적이 없는 15개국을 방문했다. 또 김병준 당시 청와대 정책실장을 주요국에 특사로 보내 지지를 부탁했다. 최광웅 전 청와대 인사제도비서관이 쓴 『노무현의 사람들』을 보면, 노 전 대통령은 심지어 자국 유엔 사무총장 후보를 낸 스리랑카 총리에게 “그래도 기회가 되면 도와달라”고 너스레를 떨었다는 일화가 나온다.
문 대통령은 “그런 노력들이 효과를 봤을 것”이라면서도 “하지만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고위급 외교전이 아니었다”고 썼다. 대신 “반 총장의 당선이 가능했던 건 당시 참여정부가 일관되게 추진했던 균형외교 정책 때문”이라고 밝혔다. 한명숙 전 총리도 노 전 대통령 영결식 때 읽은 조사(弔詞)에서 “(노 전 대통령은) 균형외교로 유엔사무총장을 배출해 냈다”고 했다. 노무현 정부는 미국 중심의 외교에서 벗어나 중국 등에도 공을 들이는 균형외교 정책을 폈다. 중국은 반 전 총장을 지지했는데, 그 배경엔 노무현 정부의 균형외교에 대한 중국의 높은 평가가 있었다고 한다. 제3세계 국가들의 지지도 같은 이유에서 가능했다.
문 대통령은 또 “미국과도 이라크 파병 등 주요 현안에서 동맹 간 신뢰가 굳건했기 때문에 폭넓은 지지를 받아낼 수 있었다”고 썼다. 노무현 청와대에서 국정상황실장을 맡았던 이광재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노 전 대통령이 한·미 정상회담이 끝나고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반기문은 확실한 친미주의자”라며 지지를 부탁한 사례를 소개한 적도 있다.
청와대 강민석 대변인은 “WTO에 우리나라가 후보를 내기로 한 배경에는 문재인 대통령의 결심이 있었다”고 전했다. 문 대통령은 WTO 사무총장 입후보 얘기를 청와대 내부 회의에서 처음으로 제안했다고 한다. 과거 노 전 대통령은 “한국에서 유엔 사무총장이 나온다는 것은 멋진 일 아니냐”라고 말한 적이 있다. 문 대통령에게도 ‘첫 한국인 WTO 사무총장’은 그런 의미일 수 있다.
윤성민 기자 yoon.sungmi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