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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의 신일본 구상, 입만 열면 규제개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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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디지털 시대에 원격 진료를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세금 완화, 원격의료, 디지털화 #“지금까지 없던 속도로 정책 펴라” #규제법안 쏟아내는 한국과 대조적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총리는 7일 열린 규제개혁추진회의에서 원격 진료 사업을 적극 추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의료계와 후생노동성 관료 등 기득권 저항에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던 사업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에 현장 진료가 어렵게 되자 일본 정부는 지난 4월 처음으로 원격 진료를 한시적으로 승인했다. 이를 아예 상시화하겠다는 게 스가 내각의 구상이다. 스가 총리는 후생노동성을 포함한 각 정부부처에도 “스스로 규제 개혁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다그쳤다.

이는 새로운 규제법안을 양산하는 한국 정치권과 대조를 보인다. 한국 규제개혁위원회에 따르면 올해 5월 말 출범한 21대 국회에서 나온 규제 법안은 하루 평균 4건이 넘는다.

취임한 지 셋째 주가 지나며 ‘스가식 개혁’이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스가 총리는 취임 직후 “규제 개혁을 정권의 한가운데 두겠다”고 선언했다. 7일 직접 주재한 규제개혁추진회의가 주요 무대다. 이어 주제별로 관계장관 회의를 열고 속도감 있게 중점 과제를 풀어가는 방식이다.

‘아베 계승’을 내세우는 스가 정권에 규제 개혁은 ‘아픈 손가락’이다. 전임 아베 총리가 쏜 ‘세 개의 화살’ 중 첫 번째 금융 완화, 두 번째 재정 확대는 어느 정도 과녁에 근접했다. 하지만 마지막 화살인 구조 개혁은 과녁을 비켜나갔다. 이 구조 개혁의 핵심은 각종 규제를 걷어내 새로운 성장 동력을 확보하는 것이다.

스가 총리가 규제 개혁을 앞세운 건 세 번째 활시위를 다시 당기겠다는 의미다. 지금까지 언급된 핵심 과제는 디지털화, 성장 잠재력 확대를 위한 중소기업과 지방은행 재편, 최저임금 인상과 휴대전화 요금 인하 등을 통한 소비 확충 등이다.

스가의 목표는 새 성장 동력…정부 부처에도 “스스로 규제 개혁하라” 

스가 총리

스가 총리

디지털화 드라이브는 코로나19를 겪으며 얻은 뼈아픈 교훈이 바탕에 있다. 여전히 팩스로 대부분의 문서를 주고받는 공무원들은 감염자나 사망자 취합조차 제때 할 수 없었다. 재난지원금 지원 과정에서도 큰 혼란이 벌어졌다. 재택근무 권고에도 “서류에 도장을 찍어야 해 출근할 수밖에 없다”는 회사원들의 불만이 터져나왔다.

스가 총리(사진)는 취임 직후 디지털청 설립을 띄우고, 연내에 설립을 위한 기본 계획을 마무리짓는다. 내년 초에는 국회에 관련 법도 내놓겠다고 밝힌 상태다. 고노 다로(河野太郞) 행정개혁 담당상도 취임 일성으로 모든 부처에 도장 사용을 중단하라고 지시했다.

중소기업 통합·재편, 지방은행 구조조정도 스가 총리가 밀어붙이는 경제 개혁의 한 축이다. 스가 총리는 취임 전부터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중소기업 효율화가 필수적이라고 강조해 왔다.

통신요금 인하, 최저임금 인상은 민생 대책이면서 소비 잠재력을 끌어올리려는 포석이다. 스가 총리는 현재 전국 평균 902엔(약 9800원)인 일본의 최저임금을 1000엔(약 1만800원)까지 빠르게 올려 경기 활성화를 꾀하겠다고 밝혔다.

보안법 발효 이후 홍콩을 떠나려는 해외 기업을 도쿄로 끌어들이기 위한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높은 소득세율을 금융허브 전략의 걸림돌로 보고 있다. 일본은 과세소득 1000만 엔(약 1억800만원) 이상의 고소득자에게 33%의 소득세를 부과하는데 이는 홍콩(17%)·싱가포르(15%)에 비해 크게 높다.

스가 내각에서 눈에 띄는 건 속도다. “나쁜 전례 타파”를 앞세운 스가 총리는 정권 발족 1주일 만인 지난달 23일 ‘디지털 개혁’ 관계장관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엔 전 부처 장관이 모두 참석해 스가 총리가 대표적인 상품으로 내놓은 디지털청 신설과 관련한 검토에 들어갔다. 스가 총리는 “지금까지 없었던 속도로 정책을 펼칠 필요가 있다”고 주문했다. 이어 관광진흥, 농산품 수출 확대를 위한 관계장관 회의를 잇따라 열었다. 자문회의 역시 정권 발족 후 3주일도 안 된 지난 6일 개최했다.

스가 총리는 취임 후 열흘 동안 민간인 전문가 14명과 직접 면담했다. 많을 때는 하루 6명의 전문가를 만나기도 했다. 관광정책, 중소기업 경영, 디지털 정책, 의료 등 분야는 전방위고 학자·기업인·언론인 등 출신도 다양하다. 공무원 조직으로부터 올라오는 정보에만 의존하지 않겠다는 의도다.

김명중 닛세이기초연구소 주임연구원은 “아베노믹스가 대기업과 부유층 중심의 정책이었던 반면, 스가노믹스는 서민에게도 직접적인 혜택이 돌아오는 정책을 전개해 민심을 사려 하고 있다”면서 “디지털화를 통해 도시 집중화를 분산시킨다면 아베 정권과 차별화된 정책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관건은 규제 개혁에 반드시 따라오는 기득권과의 싸움에서 버텨낼 수 있느냐다. 당장 원격 진료, 불임 치료비 보험 적용은 일본의사회 등이 저항하고 있다. 특히 자민당에는 각 업계와 연관된 이른바 ‘족(族)’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어 당내 의견 조정도 쉽지 않은 문제다.

하지만 스가 총리는 집권 초 지지율을 동력으로 개혁을 밀어붙이겠다는 심산이다. 통신비 인하 등에는 무파벌 총리의 한계를 국민 지지로 돌파해 보겠다는 현실적인 전략도 깔려 있다.

도쿄=윤설영 특파원, 이영희 기자 snow0@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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