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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어머니보다 할머니 추억이 더 진한 까닭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윤경재의 나도 시인(70) 

사랑한다면 세심하게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과 나 사이에 이어진 라인이 몇 개이며 어떤 궤적을 그리는지 말로, 그림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사진 pixabay]

사랑한다면 세심하게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과 나 사이에 이어진 라인이 몇 개이며 어떤 궤적을 그리는지 말로, 그림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사진 pixabay]

느티나무 영화관

느티나무 아래 평상은
공짜라서 밝은 영화관
쪽 구름 활동사진 걸어
그루터기 무릎 베고 누우면
일인다역 할머니의 손끝
까까머리 긁어 주시며 영사기 돌리셨지
그래서 그래서 추임새 따라
요술 부채에 주름살 깊이
괴기 영웅 청춘 영화가 엿장수 맘대로

첫사랑이 왔을 땐 할머니 대신
꽃들이 말 걸고 별들도 속삭였지
바람도 따라 웃다가 한숨을 지었지
언약 새겨도 떠난 숨바꼭질 고갯길
따로 찾아와 등줄기 어루만진다고
그림자 피운 연기에 눈물짓는 느티나무

괜찮다 괜찮다던 할미 손이 약손
등고선 같은 봉분 위로 감추는 것 없는
하늘엔 새털구름 양떼구름 할미 구름

해설

내가 벌써 손주를 보아도 몇 명을 보았을 이순 중반 나이가 되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할머니와 할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떠나지 않는다. 이번 추석에는 코로나19 사태로 당일 성묘를 금한다는 소식에 2주 전에 서둘러 성묘를 다녀왔다. 여러 가족이 함께 모이는 것도 염려되어 각자 형편대로 시간을 내기로 했다. 그래서 휴일에 집사람과 단둘이 할머니와 어머니를 모신 가족묘에 다녀왔다. 평소에 잘 만나지 못하다가 명절이나 되어야 만나는 삼촌과 사촌들은 전화 통화하는 거로 대신하였다.

관리소에서 산소의 잔디와 풀을 깎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잘 마른 풀 향기가 코를 간질인다. 먼저 무덤 앞 상석과 향석, 비갈에 쌓인 먼지를 깨끗이 닦아내고 떡과 과일을 진설한 뒤에 제주를 봉헌하였다. 둘이서만 차례 지내고 절을 하려니 단출하다. 음복한 후, 일꾼들이 미처 치우지 않고 버려둔 잡풀을 걷어내었다. 한데 모으니 제법 수북하다. 잔디는 햇볕을 흠뻑 받아야 잘 자란다. 우리가 지금 치우지 않으면 내년 봄에는 잔디가 비실댈 것이다. 두 봉분과 꼬리인 용미, 무덤을 둘러 싼 곡장을 발로 꼭꼭 밟으며 혹시나 들쥐 구멍이 없는지 살폈다. 여럿이 모여 왁자지껄 일하다가 둘이서만 하려니 힘에 부친다.

묘 뒤에 맥없이 키 큰 향나무를 베어냈더니 그동안 시들했던 잔디가 잘 자란다. 그만큼 식물에는 햇볕이 중요하다. 산소 주위에는 그늘을 만들지 않게 키 작은 나무를 심어야 좋다고 한다. [사진 pxhere]

묘 뒤에 맥없이 키 큰 향나무를 베어냈더니 그동안 시들했던 잔디가 잘 자란다. 그만큼 식물에는 햇볕이 중요하다. 산소 주위에는 그늘을 만들지 않게 키 작은 나무를 심어야 좋다고 한다. [사진 pxhere]

산소 앞 모서리에 선 망주석을 어루만지며 잠시 허리를 펴고 산 아래 전망을 바라보았다. 늦여름의 날씨가 남아 있어 볕이 따갑게 내리쪼인다. 골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얼굴의 땀을 식혀준다. 앞산에는 땅을 파고 전원주택 공사가 한창이다. 조용했던 이곳도 개발 붐이 일어 카페와 전원주택이 들어서기 시작한다.

재작년에 어머니 산소를 쓰고 묘 뒤에 맥없이 키 큰 향나무를 베어냈더니 그동안 시들했던 잔디가 잘 자란다. 그만큼 식물에는 햇볕이 중요하다. 산소 주위에는 그늘을 만들지 않게 키 작은 나무를 심어야 좋다고 한다. 늘 그랬듯이 산소를 둘러싼 12그루의 소담한 옥향나무와 주목 전지작업은 내 몫이다. 집에서 가져온 전지가위로 웃자란 가지를 다듬는다. 일 년에 한식과 추석 두 차례 가지런히 이발을 시켜놔야 산소가 정갈하다. 종손으로서 그래야 자손이 번성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올해엔 주목에 빨간 열매가 닥지닥지 열렸다. 반가운 일이 생길 듯 상서로운 조짐이다.

산소 일을 마치고 돗자리에 누워 과일을 먹으며 어릴 적 이야기를 집사람과 나누었다. 이상하게 어머니에 대한 기억보다 할머니에 대한 추억이 더 진하다. 아마 조부모가 전해주신 깊은 사랑이 사무쳐서 그럴 것이다. 나도 그랬지만 부모 입장에선 잘 먹이고 교육을 잘 시키는 게 우선인 데 비해 조부모는 어떻게든 손주를 예뻐하고 사랑을 듬뿍 주려고 하지 않던가.

나는 여름과 겨울 방학 때는 외가에 내려가서 지냈다. 4남 5녀 대가족인 외가엔 나보다 나이 어린 외삼촌이 있을 정도여서 학창시절을 비슷하게 보냈다. 저녁상을 물리고 나면 외할아버지께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동화며 삼국지 이야기를 실감 나게 풀어주셨다. 도원결의며 제갈공명의 적벽대전 등을 변사처럼 어조를 바꾸어가며 풀어주셨다. 고등학생인 큰외삼촌부터 중학생인 이모며 초등학생인 나는 밤이 깊어 가는 줄 모르고 몰두하며 들었다. 이모에게는 바둑도 배웠다.

친할머니와 외할아버지를 떠올리면 두 분은 사람을 이해하고 관찰하는 능력이 탁월했던 것 같다. 손주가 무엇을 원하는지 금세 알아채고 또 살을 덧붙여 상상의 날개를 펼 수 있도록 이끄셨다. [사진 pixabay]

친할머니와 외할아버지를 떠올리면 두 분은 사람을 이해하고 관찰하는 능력이 탁월했던 것 같다. 손주가 무엇을 원하는지 금세 알아채고 또 살을 덧붙여 상상의 날개를 펼 수 있도록 이끄셨다. [사진 pixabay]

친할머니께서는 나를 보면 언제나 치마를 들치고 고쟁이에서 동전을 꺼내 주전부리하라고 용돈을 주셨다. 그 맛에 일부러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할머니 댁에 심부름을 가곤했다. 졸려 하면 당신의 무릎을 내어주시고 내 머리를 긁어주셨다. 그러면 금세 잠이 들었다. 일찍 혼자되신 할머니는 쌀장수 등 온갖 일을 억척스레 하면서도 5남 3녀를 잘 키우셨다. 넉넉한 성품이라 동네에서 손 크게 베풀고 구수한 입담도 잘하셨다. 기회가 되면 내게는 구전동화에 살을 붙여 이야기해 주셨다. 어쩌면 기억력이 그렇게 좋은지 놀랄 뿐이었다. 내가 커서까지 할머니 배움이 짧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살면서 손주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수준에 맞게 해주려고 노력하셨던 것 같다.

친할머니와 외할아버지를 떠올리면 두 분은 사람을 이해하고 관찰하는 능력이 탁월했던 것 같다. 손주가 무엇을 원하는지 금세 알아채고 또 살을 덧붙여 상상의 날개를 펼 수 있도록 이끄셨다. 힘든 왜정시대와 전쟁을 겪으면서도 생활에 쪼들린 모습을 자손들에게 보여주지 않으려고 노력하셨다. 명절이 되면 비록 비싸고 좋은 옷이 아니더라도 정갈한 옷을 마련해 주셨다. 살아가면서 자존감을 잃지 말라는 교훈을 주고 싶으셨나 보다.

두 분의 깊은 심정을 이해하게 된 것은 코난 도일의 소설에서 셜록 홈스와 조수 왓슨의 대화를 읽고 난 후였다.

“자네는 보고는 있지만, 관찰하고 있지는 않다네. 그 차이는 명백하지. 예를 들어 자네는 현관에서 이 방으로 오는 계단을 자주 봤을 테지.” “자주 봤지.” “그럼, 계단이 몇 개인지 아나?” “계단이 몇 개냐고? 몰라.” “바로 그 걸세. 자네는 관찰하지 않아. 그래도 보고는 있지. 나는 계단이 17개라는 걸 알고 있네. 왜냐하면 나는 보고 관찰하기 때문이지.”

셜록 홈스는 주위의 모든 사물과 내용을 그냥 바라보는 게 아니라 늘 물음을 던지며 관찰하였다. 그의 눈은 모든 사물을 어떤 틀(스키마, schema) 아래에서 인식하고 그것을 통해 기억에 남겼다. 사물에 대해 확고한 시각적 틀을 지닌 홈스는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엔 누구도 관찰하려 들지 않으나, 그러나 자신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홈스에 따르면 이 세상은 발견하려 들면 모든 것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는 것들로 이루어진 세계다. 우리가 세상을 건성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그냥저냥 지나갈 뿐이다. 무엇인가에 관심을 갖고 사랑한다면 세심하게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과 나 사이에 이어진 라인이 몇 개이며 어떤 궤적을 그리는지 말로, 그림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은 밝은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가득 차 있다. 자신을 발견해 주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

한의원 원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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