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가족은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고슴도치’ 사이

중앙일보

입력 2020.09.10 13:00

[더,오래] 윤경재의 나도 시인(68)

"오늘 날씨 참 좋네요 아, 이 꽃이 글라디올러스 저건 접시꽃 줄 맞추어 피니 꽃 악보 같지 않아요" [사진 pxhere]

"오늘 날씨 참 좋네요 아, 이 꽃이 글라디올러스 저건 접시꽃 줄 맞추어 피니 꽃 악보 같지 않아요" [사진 pxhere]

오선지 꽃 악보

사부작사부작 소곤대는 빛의 정원
눈 맑은 꽃의 색깔들
시선 마주치기를 기다렸나
너와 나, 그 먼 사이
발그레한 시간여행을 버무린다

오늘 날씨 참 좋네요
아, 이 꽃이 글라디올러스
저건 접시꽃
줄 맞추어 피니 꽃 악보 같지 않아요
꽃들은 이름값을 하죠
추억의 떨림 속에선
모두가 꽃으로도 음악으로도 피는군요

믿음직한 時間 해의 꽃
언약을 기다리는 期間 달의 꽃
눈 깜짝할 瞬間 별의 꽃
부끄러움 감춰주는 區間 구름의 꽃

세상을 눈높이 꽃대에 걸어둔 건
오선지 선율 따라
고개를 끄덕여 보라는 거였군요

해 달 별 구름, 궂은비라도 오고 가는 건
반갑다고 덤벙 마음을 다치기보다
날씨 인사로라도 서로 통하라는 거겠죠

해설
공원길을 걸으면 갈마드는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어 좋다. 계절 따라 변하는 빛의 기울기와 내 마음에 따라 공원에서 만나는 작품이 매번 달라 보이기도 한다. [중앙포토]

공원길을 걸으면 갈마드는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어 좋다. 계절 따라 변하는 빛의 기울기와 내 마음에 따라 공원에서 만나는 작품이 매번 달라 보이기도 한다. [중앙포토]

코로나19가 일상에서 누리던 소소한 풍경마저 많이 바꾸어 버렸다. 특히 거리에서 스쳐지나가는 사람을 공연히 의심의 눈초리로 살피고 서로 멀찍하니 떨어져 안전한 간격을 확보하려는 무의식이 솟구치기도 한다.

집에서 내가 근무하는 한의원 사이에 올림픽공원이 있다. 걸어서 출근하면 45분 정도 걸린다. 아침에 운동 삼아 걷기에 적당한 거리이다. 날씨가 웬만하면 걸어서 출퇴근하려 노력한다. 공원길을 걸으면 갈마드는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어 좋다. 마주치는 사람의 움직임과 표정에서 아픈 환자에서 느끼지 못하는 생동감을 받았다. 공원 곳곳에 감춰진 조각 작품을 보물찾기처럼 챙겨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계절 따라 변하는 빛의 기울기와 내 마음에 따라 만나는 작품이 매번 달라 보인다. 코스를 정하지 않고 그날 기분과 발걸음에 따라 바꾸다 보니 공원을 빙 돌 때도 있다. 대개는 꽃이 활짝 필 때다. 덕분에 계절과 꽃들이 말하는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된다.

그날은 올림픽 88호수공원 길가에 접시꽃이 활짝 핀 유월 중순이었다. 여고생으로 보이는 성숙한 느낌의 학생이 다가와 꽃 이름을 묻는다. 나란히 열 지어 솟아오른 줄기에 흰색, 연노랑, 연분홍, 붉은색으로 색색이 피어오른 꽃잎에 감동받은 듯 싶다. 접시꽃 곁에서 이리저리 사진을 담는 내 모습에 호기심이 일었나 보다.

“이 꽃이 접시꽃이에요. 예쁘죠?”하니 쌕~하고 입가에 밝은 미소를 짓는다. “꽃잎이 넓적하니 접시를 닮았다고 이름이 붙었어요”하니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 끄덕임을 보는 순간 평소와 다른 영감이 떠올랐다. 손에 플루트가 들어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작은 악기가방을 든 그 학생 모습이 접시꽃과 중첩되어 눈에 들어왔다. 나란히 한 줄로 열 지어 선 꽃대에 높낮이를 달리하며 핀 접시꽃이 오선지 악보이며 음표 같아 보였다. 그 학생은 악보에 맞추어 플루트를 불고. 속으로 얼마나 감동했는지 모른다. 어떤 전율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어린 그녀를 통해 자연이 내게 준 커다란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런 느낌을 학생에게 전하지는 못했다. 나이 먹은 내게 다가와 스스럼없이 꽃 이름을 물어준 것만도 고맙고 기특했다. 둘이 언어가 통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기분이 상쾌했다. 그 정도에서 물러나는 게 예의일 게다. 아마 음악을 전공하는 학생이니 나와 비슷하게 세상의 음향을 담은 오선지 악보를 떠올렸을 것이다.

살다 보니 남과 자연스레 인사를 나누고 지낸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게 된다. 서양인은 ‘굿 모닝’ 또는 ‘하이’하고 다정한 목소리와 함께 입가의 미소로서 인사를 교환한다. 그에 비해 우리 인사말 ‘안녕하세요’는 왠지 격식이 느껴진다. 말하는 대신 입은 다물고 고개만 숙이며 눈인사하는 편이다. 말소리와 행동이 따로 겉도는 것이랄까? 그렇다고 ‘좋은 아침’이라는 인사말은 억지스런 느낌이 든다. 자칫하다가 눈길이 어긋나면 인사를 한 건지 안한 건지 모르게 된다. 나도 가끔 부끄럽고 곤란한 경우를 만들곤 했다.

처음 말을 꺼낼 때 상대방에게 긍정적인 답변을 이끄는 질문을 하는 게 좋다고 한다. 그 방법으로 그날 날씨 이야기를 첫머리에 올리는 걸 권한다. [사진 pxhere]

처음 말을 꺼낼 때 상대방에게 긍정적인 답변을 이끄는 질문을 하는 게 좋다고 한다. 그 방법으로 그날 날씨 이야기를 첫머리에 올리는 걸 권한다. [사진 pxhere]

소통 전문가들은 처음 말을 꺼낼 때 상대방에게 긍정적인 답변을 이끄는 질문을 하는 게 좋다고 한다. 그 방법으로 그날 날씨 이야기를 첫머리에 올리는 걸 권한다. 날씨에 관해 이견을 낼 리가 없기 때문이란다. 처음부터 상대방과 같은 의견이라는 생각이 들면 동류의식이 들어 어려운 협상이 매끄럽게 진행된다고 한다. 노련한 외교관이 주로 이 방법을 쓴다고 한다.

나이 든 사람이 무심코 저지르는 큰 실수가 하나 있다. 딴에는 반갑다는 의미로 손아랫사람에게 이것저것 묻곤 하는데, 이런 질문을 받은 입장은 여간 곤란하지 않다. 명절이나 제삿날에 여러 식구가 모이면 자연스레 학교성적, 취직, 결혼, 육아 등등이 화제가 된다. 이럴 때 나이 먹은 사람이 정말 조심해야 된다. 아무래도 충고하는 입장, 해석하는 말, 판단하는 자세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자랄 적에는 어른의 이런 질문은 정말로 걱정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왜냐하면 우리 윗세대는 그 당시 같은 처지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질문하는 사람이나 질문 받는 사람이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분명히 지금 두 세대 사이에 어떤 능력과 힘의 차이가 존재한다. 적어도 우리 아랫세대는 그렇게 여긴다. 그걸 깨달아야 한다. 나도 그런 호된 체험이 있다. 나름대로 생각해서 곤란한 질문은 빼고 조카 녀석에게 말한다는 게 “몸이 좋아 보인다. 살이 좀 찐 것 같다”고 했다가 나중에 아들에게 뭘 모른다며 지적을 당했다. 뒤늦게 조카에게 사과 할 수도 없어 난감했다.

너무 가깝지도 그렇다고 멀지도 않은 사이를 ‘고슴도치 사이’라고 한다. 지나치게 가까우면 가시에 찔리고 멀면 잊게 되는 사이를 말한다. 가족관계가 고슴도치 사이가 아닐까 한다. 어찌 됐든 윗사람이 나서서 관계정립을 잘해야 한다. 그게 세상사는 이치이다.

긍정적 교류의 최고 단계를 ‘아하 체험’이라고 한다. ‘아하 체험’은 종교적, 초월적 깨달음을 말하기도 한다. 자기가 미처 깨닫지 못한 진리나 지혜를 어떤 우연한 만남이나 스승의 의도적 이끌림에 힘입어 깨달음 상태에 들어가는 것을 ‘아하 체험’이라 한다. 오랫동안 궁금했던 의문이 한 번에 해소되는 걸 말한다. ‘아하 체험’은 의문의 해소이며, 지혜의 성숙이며, 인격의 완성을 뜻한다. 일상에서도 아하 체험은 둘 사이의 관계를 호의적이며 돈독하게 한다.

어떤 인연이든지 시작은 우연한 부딪침에서 나온다. 그 부딪침이 어떻게 구를지는 각자가 할 탓에 달렸다. 긍정의 길이든 부정의 길이든. 그날 우연히 마주친 여고생의 소녀다운 질문이 내게 커다란 울림으로 남은 건 그녀가 도리어 내게 스승 역할을 했다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코로나19 이전의 일상이 새삼 그리워진다.

한자는 형상을 그린 문자이므로 글자를 살펴보면 어떤 의미가 담겼는지 알 수 있다. 시(時)는 ‘해와 믿을만한 곳인 시(寺)’가 합쳐 일정한 때를 나타낸다. 기(期)는 ‘달과 두 사람이 약속해 놓은 그(其) 날’을 합쳐 기약을 뜻한다. 순(瞬)은 눈이 깜박이는 잠깐의 순간이다. 구(區)는 자잘한 물건들을 정리해 일품(一品)으로 감추어둔 모양이다. 거기에 사이 간(間)자가 합쳐져 새로운 뜻이 생겨났다. 시간은 틀림없이 찾아온다는 의미이다. 기간은 얼마간 숙성되어야 하나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순간은 극히 짧은 시간이며, 구간은 군데군데 마무리 지어 정리한다는 뜻이다.

한의원 원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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