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도넛 만드는 사람·시인·한의사의 공통점

중앙일보

입력 2020.07.30 13:00

[더,오래] 윤경재의 나도 시인(65)

진맥과 자침

또 한 분의 스승이 머뭇
수수께끼 生을 내미신다

담장 위의 관찰실
묻고 듣고 생각하고 분별하고 그리고
탄력 있는 삶은 배우기로

헝클어진 실타래 풀 듯
끈기와 경중을 알맞게 변통해야
겨우 하치를 면한다

제 몸으로 아파보고
가족도 빛을 기도하듯
그분의 손길을 믿고 맡겨보아야
찾아오는 가르침들을 사랑하게 된다

땅속 뿌리줄기가
열두 가락 음률처럼 귀에 익고
보듬는 모성 임맥, 살피는 부성 독맥
신령처럼 소통하길

내 이승과 저승 고비길이듯
바람의 구두점 하나 제대로 놓이기를

해설
‘도넛을 만드는 사람’과 ‘그물 짜는 사람’ 그리고 ‘시인’의 공통점은 ‘구멍을 뚫는 작업’을 하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사진 pexels]

‘도넛을 만드는 사람’과 ‘그물 짜는 사람’ 그리고 ‘시인’의 공통점은 ‘구멍을 뚫는 작업’을 하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사진 pexels]

‘도넛을 만드는 사람’과 ‘그물 짜는 사람’ 그리고 ‘시인’의 공통점이 무엇일까? 어떤 수필집에서 읽은 질문이다. 그 작가가 내놓은 답은 공기가 지나다니는 ‘구멍을 뚫는 작업’을 하는 사람이란다. 나아가 그들을 ‘공기를 훔치는 사람들’이라고 멋들어진 표현까지 해서 기억에 더 오래 남는다.

이렇게 보면 한의사도 구멍을 뚫는 작업에 한몫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침술을 영어로 ‘acupuncture’ 라고 하는데 ‘날카로운 것으로 몸에 구멍을 뚫는다’는 의미가 담겼다. 동물과 인체에는 생명의 기가 순환하는 어떤 소통경로가 있다. 그 경로를 경락이라고 부른다.

한의과 대학에서 경락과 침술을 처음 배우고 나서 아주 실감나는 체험을 했었다. 학창시절 아파트가 아닌 단독주택에서 예쁜 강아지를 키우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일인지 그 아이가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져 있었다. 아마 옆집에서 쥐약을 놓았는데 그것을 삼킨 것 같았다. 아주 응급 사태라 동물병원에 데리고 갈 형편이 안 됐다. 그때만 해도 동네에 동물병원도 무척 드물 때였다. 나는 학교에서 배운 것을 응용해 침을 놓았다. 먼저 앞, 뒷다리의 사관을 트고 척추 근처의 배수혈 자리를 어림짐작으로 찾아서 침을 여러 군데 놓았다. 그랬더니 즉시 삼킨 걸 토하고 제 발로 일어섰다. 그러곤 애처로운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는데 살려주어서 고맙다는 눈길이 절절했다. 여기에 무언가 있다는 그 체험이 내가 한의학 공부를 열심히 하는데 일조했다.

인체에는 12 가닥의 정경과 몸의 앞뒤 중심선을 위아래로 지나가는 임맥(任脈)과 독맥(督脈)이 있다. 6장6부를 연결하는 12정경은 한 줄로 이어져 있어 하루 종일 전신순환하면서 기가 흐른다. 보통 5장6부만 아는데 여섯 째 장기는 정신활동을 담당하는 무형의 장기인 심포(心包)경락이 추가된다. 심포는 우리가 흔히 ‘심보가 고약하다’, ‘도둑놈 심보’ 등을 표현할 때 쓰는 심보를 떠올리면 된다. 요즘처럼 정신적 스트레스로 질병을 앓는 사람이 많을 때, 심포경을 잘 다스려주면 불면증, 우울증, 분노장애, 공황장애 등을 예방, 치료할 수 있다.

임맥은 복부 쪽을 흐르는데, 임(任)자는 담임 선생님, 임신 등을 떠올리면 그 기능이 무얼 뜻하는 지 상상할 수 있다. 인체의 원기, 선천의 정기를 품었다가 조금씩 풀어주는 역할을 한다. 독맥은 꼬리뼈에서 정수리까지 등 쪽 척추 위를 흐르는데, 독(督)자는 살펴보다, 바로잡다, 경계하다는 의미가 담겼다. 외부에서 나쁜 기운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주는 경락이다. 임맥과 독맥은 융의 심리학적 해석으로 보면 사람이 지닌 아니마, 아니무스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한 사람에게 남성적, 여성적 면모가 동시에 작동한다는 말이다.

장미는 한밤중에 가장 향기로운 향을 발산하기 때문에 향수 제조자는 반드시 한밤중에 일어나 장미꽃을 딴다. [사진 pxhere]

장미는 한밤중에 가장 향기로운 향을 발산하기 때문에 향수 제조자는 반드시 한밤중에 일어나 장미꽃을 딴다. [사진 pxhere]

세계에서 질 좋은 향수의 원료가 되는 장미향 에센스를 생산하는 곳은 불가리아 중부의 ‘카잔루크’라고 한다. 발칸 산맥이 지나는 산악지형으로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장미꽃 단지라고 한다. 향수 제조자는 반드시 한밤중에 일어나 장미꽃을 딴다. 기온이 떨어져 가장 추운 밤12시부터 장미를 따기 시작해서 두 시간 안에 일을 끝내야 한다. 하루 중 기온이 가장 낮고 고요한 한밤중, 그것도 짧은 시간 내에 장미를 따는 데에는 과학적인 근거가 있다. 장미는 한밤중에 가장 향기로운 향을 머금고 발산하기 때문이다. 태양이 비치는 낮에는 장미향이 날아가 오히려 40% 가량 감소된다고 한다.

장미향뿐만이 아니다. 모든 생명의 에센스는 만물이 쉴 때, 드러나지 않고 고요한 시간과 장소에서 주로 만들어 진다. 번잡하고 산만한 환경에서는 질 좋은 에센스가 쌓이기 어렵다. 인간의 성장 호르몬도 한밤중 잠자며 휴식할 때 제일 왕성하게 분비된다.

한의학적으로는 밤은 음기가 왕성해져 부족한 기를 보충하고 수습하는 시간이다. 낮은 양기가 활동하여 기를 발산시키는 시간이다. 기는 발산하기만 하면 반드시 고갈된다. 이럴 때 나타나는 증상을 ‘음허화동’이라고 부른다. 공연히 얼굴이 뜨거워지고, 흥분을 잘하며, 입이 마르고, 불면증, 심장의 두근거림, 땀이 삐질삐질 나며, 울화증, 몸이 마르는 증상이 오게 된다. 요즘 우리사회에 ‘음허화동’에 걸려 고생하는 사람이 매우 많다. 이럴 때는 꾸준히 음기를 아끼고 보충하여야 하고, 양기가 쓸데없이 치솟는 일을 삼가야 한다.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의미를 ‘영과 혼과 육’의 관계로 설명하면, 음허화동은 우리의 겉모습에 지나지 않는 ‘혼과 육으로 이루어진 에고’가 구시렁대는 것이다. 에고는 늘 자신의 경험치를 최고 진실인양 확신하고 산다. 영은 자기 내면의 본성에서 나오는 목소리이다. 아주 소박하고 간단한 목소리다. 타인을 네 몸처럼 여기라는 것과 네가 당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는 양심의 목소리다. 자신의 경험이 틀릴 수도 있으니 타인의 피드백을 통해 자신의 잘못을 고치려고 애쓰라는 것이다.

침놓는 일은 기가 막혀서 흐름이 더뎌진 곳을 찾아 바람구멍을 내주는 일이다. [사진 pxhere]

침놓는 일은 기가 막혀서 흐름이 더뎌진 곳을 찾아 바람구멍을 내주는 일이다. [사진 pxhere]

한의사가 된지 40년이 되었다. 그동안 저질렀던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진료실이란 말을 쓰지 않고 나와 환자의 생명현상을 관찰하는 관찰실이라 부른다. 진맥을 하면서 찾아주신 분에게 궁금한 걸 묻고 듣고 생각하고 분별하고, 전체 그림을 그리는 일이 우선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제법 걸린다. 그럴 때 나는 오히려 그분들이 내게 어떤 가르침을 주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침놓는 일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고 기가 막혀서 흐름이 더뎌진 곳을 찾아 바람구멍을 내주는 일이다. 그럼 기운이 저절로 소통해 자신의 생명력이 스스로 치유를 한다. 어떤 때는 말 한마디로도 응원과 휴식을 주어 기운이 소통할 때도 있다. 하지만 나를 찾아온 절실함을 한 순간이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마치 내가 앓고 아팠고, 겪었던 생사의 갈림길을 지금 이분도 겪고 있을 거라고 매번 공감해주어야 한다.

그럴 때 나는 진정 ‘공기를 훔치는 사람’이 되는 것이리라.

한의원 원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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