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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책의 죽음 겪을 도서정가제 개악… 독자가 최대 피해자"

중앙일보

입력

6일 서울 마포구 한국출판인회의 강당에서 열린 도서정가제 여론조사 결과 발표 및 작가 토크에서 소설가 한강이 발언하고 있다.[한국출판인회의 페이스북 캡처, 연합뉴스]

6일 서울 마포구 한국출판인회의 강당에서 열린 도서정가제 여론조사 결과 발표 및 작가 토크에서 소설가 한강이 발언하고 있다.[한국출판인회의 페이스북 캡처, 연합뉴스]

“책들의 죽음을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겪게 될 거라 생각해요. 최대 피해자는 독자들이죠.”

소설 ‘채식주의자’로 아시아 최초로 세계적 문학상 ‘맨부커상’을 수상한 소설가 한강이 정부의 도서정가제 개정안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6일 한국출판인회의가 주최한 ‘도서정가제 작가 토크’에서다. 도서정가제는 2014년 출판 시장 유통 질서를 바로잡고자 책값 할인을 정가의 15% 이내로 제한한 제도로, 출판문화산업진흥법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3년마다 도서정가제의 타당성을 검토해 폐지·완화 또는 유지 등의 조치를 취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2017년 타당성 검토 작업을 거쳐 2014년 도서정가제가 올 11월까지 연장된 바 있다. 문체부는 지난 7월부터 이를 완화하는 골자의 개정안을 내놔 출판계와 갈등을 빚어왔다.

소설가 한강, 정부 도서정가제 개정안 비판

한강 "정가제 없던 세계 돌아가는 것 무섭다"

이날 박준 시인과 작가 대표로 참석한 그는 “내 첫 번째 정체성은 작가가 아니라 독자다. 도서정가제 없는 세계를 겪어봤기에 당시로 돌아가는 게 무섭다”면서 “도서정가제가 없었던 때는 베스트셀러 순위에 느닷없이 그날 많이 할인된 책들이 올라가기도 하고 생태계가 완전히 붕괴됐다. 출판사는 신작을 내는 데 부담을 겪고 그렇게 다들 몸을 사리다 보니까 젊은 작가들, 뭔가 다른 것을 말하고 싶은 출판인들이 설 땅이 점점 좁아졌다”고 돌이켰다. “다 무너지고 있다고 생각될 때 도입된 게 도서정가제”라며 “그 제도를 만들어놓으니까 신기하게도 1인 출판, 모험적인 책들, 대안적 목소리들, 작가들, 서점들이 자발적으로 살아났다. 지금 정부는 시민의 자발성에 빚지고 있는데, 자라날 수 있는 씨앗이 좀 더 길게 자라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출판인회의와 한국작가회의가 6일 '도서정가제를 지지하는 작가들의 목소리'를 공개했다. 작가 김연수, 김탁환, 이금이, 정유정, 칼럼니스트 박상현 등이 참여했다. [사진 한국출판인회의,한국작가회의]

한국출판인회의와 한국작가회의가 6일 '도서정가제를 지지하는 작가들의 목소리'를 공개했다. 작가 김연수, 김탁환, 이금이, 정유정, 칼럼니스트 박상현 등이 참여했다. [사진 한국출판인회의,한국작가회의]

현행 도서정가제는 지난해 11월 ‘완전 도서정가제를 반대하는 생태계 모임’이란 단체가 시장논리를 내세워 도서정가제 폐지를 주장한 국민청원에서 20만명 서명을 채우면서 쟁점으로 떠올랐다. 이에 출판계는 지금의 도서정가제가 완화되거나 폐지된다면 대자본으로 무장한 온라인 서점, 대형출판사에만 유리한 도서정가제 이전으로 돌아갈 것을 우려해왔다. 출판인회의 등 30여개 단체가 구성한 도서정가제 사수 공동대책위원회 위원장인 김학원 출판인회의 회장은 지난 6년간 동네서점, 작은 출판사, 젊은 작가들의 데뷔가 늘어난 것이 도서정가제의 긍정 효과라며 시장논리에만 맡겨선 이런 책의 다양성이 보장되기 힘들다고 내다봤다.

한강 작가는 “독서 시장이 커다란 자본 입장에서 보면 여전히 많은 플랫폼이 존재하는 완전히 건드려지지 않은 생태계다. 이 생태계가 무너지면 뭔가 이윤을 창출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봄직하다”면서 “도서정가제가 개악되면 이익을 보는 사람은 극소수고 많은 ‘작은 사람’들은 잃는 줄도 모르고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이다. 국민청원 넣은 분들도 그중 하나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작은 서점 지원하는 문체부, 분열적 정책 이해안가"

지난 5일 한국출판인회의가 펴낸 도서정가제에 관한 단행본 『도서정가제가 없어지면, 우리가 읽고 싶은 책이 사라집니다: 출판과 문화를 살리는 도서정가제 바로 알기』. [사진 한국출판인회의]

지난 5일 한국출판인회의가 펴낸 도서정가제에 관한 단행본 『도서정가제가 없어지면, 우리가 읽고 싶은 책이 사라집니다: 출판과 문화를 살리는 도서정가제 바로 알기』. [사진 한국출판인회의]

이날 행사에선 그를 비롯한 여러 작가의 도서정가제 지지 발언이 소개됐다. 김탁환 작가는 “책에 필요한 값은 싼값이나 비싼 값이 아니라 제값이다”라고 했고, 소설가 정유정은 도서정가제를 “작은 출판사와 동네 책방들을 살리는 최소한의 산소호흡기”라 빗댔다. 최근 출시된 넷플릭스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의 원작 소설가 정세랑은 “출판 단행본의 경우 전자책 판매는 파행으로 운영되고 있다. 특히 대여 서비스는 권당 400원가량의 인세를 지급하는데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금액을 받고 신인 작가들이 갈려 들어가고 있다”면서 “작은 생산자들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도서정가제를 이끌어주길” 바랐다.

이날 출판인회의와 한국작가회의가 밝힌 공동 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달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를 통해 전국 시인‧소설가 등 문인 2300여명, 비문학 작가 1200여명 등 총 3500여명을 조사, 1135명이 응답한 설문(신뢰도 95%에 표본 오차 ±2.9% 수준)에서 응답 작가의 70%가 현재 도서정가제를 유지(39.7%) 또는 강화(30.2%)해야 한다고 답했다. 도서정가제가 도움 되는 분야에 대한 응답 1위가 가격 경쟁의 완화(62.8), 이어 작가의 권익 신장(58.5), 동네서점의 활성화(54.8%), 신간의 증가(31.7%), 출판사의 증가(18%) 순서였다.

[사진 한국출판인회의]

[사진 한국출판인회의]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인 신현수 시인은 “작가회의가 2018년부터 3년간 문체부에 약 10억원 지원을 받아서 작은 서점 지원 사업을 하고 있는데 같은 문체부에서 작가‧출판사‧서점을 목 조르는 분열적인 정책을 하는 게 도저히 이해가 안 되고 속상하다”며 “촛불정권이란 문재인 정권에서 이런 얘기를 하게 될 줄 정말 몰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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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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