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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부 적고 2m 떨어진 의자에 앉고…부천의 첫 '방역 집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21일 오전 9시30분쯤 부천시의회 앞에서 부천시 기독교총연합회가 주최한 집회가 열리고 있다. 심석용 기자

21일 오전 9시30분쯤 부천시의회 앞에서 부천시 기독교총연합회가 주최한 집회가 열리고 있다. 심석용 기자

“나쁜 인권보장조례 철회하라!”

21일 오전 9시30분쯤 경기도 부천시 부천시의회 앞. 도로변에 정차된 트럭에 마련된 연단에 오른 한 남성이 마이크를 들고 “부천시의회 의원들 각성하라”고 소리치자 맞은편에서 “각성하라”고 따라 외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맞은편 인도에는 2m 간격으로 떨어진 채 설치된 간이 의자에 집회 참가자 70여명이 마스크를 쓴 채 앉아 있었다. 모자와 마스크를 쓴 채 이날 집회에 참여한 60대 여성 A씨는 “의회 앞에 도착한 뒤 발열 체크를 하고 명단을 적은 뒤 소독도 하고 의자에 앉았다”며 “3명이 돌아가면서 집회 참석자 수, 방역수칙 준수 여부를 확인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부천시의회 앞에서는 부천시 기독교총연합회가 주최한 동성애 옹호 조례 반대 집회가 열렸다. 집회를 주최한 박경미 부천동성애대책시민연대 공동대표는 “박명혜 시의원 등 12명이 공동발의한 ‘부천시 인권보장 및 증진에 관한 조례안’에 따르면 인권 옹호관을 두고 특정 시민단체가 시 예산을 이용해 인권 교육을 하게 된다”며 “반대 목소리를 내기 위해 집회를 열었다”고 말했다. 집회는 경찰 2개 중대 140여명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전 11시쯤 마무리됐다. 부천시 관계자는 “집회 주최 측이 방역수칙을 지키면서 집회를 마무리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밝혔다.

21일 오전 9시30분쯤 부천시의회 앞에서 부천시 기독교총연합회가 주최한 집회가 열리고 있다. 심석용 기자

21일 오전 9시30분쯤 부천시의회 앞에서 부천시 기독교총연합회가 주최한 집회가 열리고 있다. 심석용 기자

집회 금지 통보한 부천시와 경찰

지난 15일 부천시 기독교총연합회(연합회)는 경찰에 옥외집회를 열겠다고 신고했다. 부천시는 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감염병예방법) 제49조에 의해 집회를 금지한다고 통보했다. 경찰도 코로나19 확산 추세에 비춰볼 때 이 집회가 안녕과 질서에 위협을 끼칠 것이 명백하다는 이유로 집회 금지를 결정했다. 부천시는 지난달 21일 시내에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집회 제한 고시’를 한 상태였다. 연합회는 통보 당일 인천지방법원에 옥외집회금지처분 집행정지를 요청했다. 집회 규모·시간·방법 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전면적으로 집회를 금지한 부천시의 처분이 평등· 비례 원칙 등에 위배돼 재량권을 일탈·남용했다는 주장이었다.

法, 집회 금지 대신 엄격한 기준 내세워 허용 

법원이 허용한 21일 부천시의회 앞 집회의 제한 범위. [장덕천 시장 페이스북]

법원이 허용한 21일 부천시의회 앞 집회의 제한 범위. [장덕천 시장 페이스북]

고심에 빠진 법원은 장고를 거듭했고 지난 20일 자정쯤에서야 결정을 내렸다. 부천시가 내린 옥외집회금지처분을 집행정지한다는 결정이었다. 법원은 시장 등이 감염병 예방을 위해 집회 규모·장소 등을 제한할 수 있지만, 감염병 확산이 분명하게 예상될 때 최소 범위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봤다.

재판부는 ▶10인 이상의 옥외집회를 전면금지한 결정이 과도한 제한에 해당해 효력을 그대로 인정할 수 없는 점 ▶최근 6일간 신규 확진자 수가 한 자릿수인 부천 상황이 10인 이상의 옥외 집회를 전면 금지할 정도로 심각하다 보기 어려운 점 ▶옥외집회는 실내활동보다 감염병 확산 위험성이 덜한 점 ▶방역수칙을 준수한다면 이 집회로 코로나 19가 퍼질 가능성이 상당히 적다고 보이는 점 등을 고려했다.

재판장은 “이 사건 처분으로 신청인의 집회 자유가 침해되는 한편, 처분 집행을 정지함으로써 공공복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면서도 “집회를 신고된 그대로 허용할 경우 코로나19 확산 위험성이 더 커질 수 있으므로 제한된 범위 내에서만 처분 집행을 정지함이 상당하다”고 밝혔다.

재판부가 제한한 범위는 ▶체온 측정 후 섭씨 37.4도 이하인 참석자에 한해 명부 작성· 손 소독제 사용 후 입장을 허용할 것 ▶집회 참석자는 모두 KF-80/94 마스크를 계속 착용하고 미착용자는 입장 불허할 것 ▶집회 장소 내 2m 이상 거리 두고 의자를 설치하고, 집회 동안 참석자는 의자에 착석할 것 ▶방역 당국과 경찰 조치에 협조할 것 등이다. 법원 관계자는 “재판부가 코로나19와 표현의 자유 사이에서 고민 끝에 내린 결정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장덕천 부천시장은 “이번 집회가 허용되면 다른 집회 신고도 이어질 텐데 방역 당국이 다 감독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라며 “현재 코로나19 상황이 간신히 안정세로 가고 있는데 집회가 열리면 확진자가 늘어날 우려가 있으니 당분간은 막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며 법원 판단에 아쉬움을 드러냈다.

개천절 집회 영향 미칠까

최인식 8·15 비대위 사무총장이 16일 오후 서울 종로경찰서 앞에서 개천절 집회 신고에 앞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최인식 8·15 비대위 사무총장이 16일 오후 서울 종로경찰서 앞에서 개천절 집회 신고에 앞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편 법원의 이번 결정이 개천절에 예고된 서울 도심 집회 허용에 영향을 미칠지 관심이 쏠린다. 경찰은 이날까지 개천절에 신고된 집회 798건 중 10명이 넘는 집회에 대해 모두 금지 통고를 했다. 서울 종로구 등에 1000명 규모의 집회를 신고한 8·15 집회 참가자 비상대책위원회는 지난 18일 경찰의 금지 통고에 반발해 집회 강행 방침을 밝힌 상태다. 김창룡 경찰청장은 “집회 장소에 경찰을 사전 배치하는 등 집결 자체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겠다”며 “법원의 인용으로 집회가 개최되는 사례가 없도록 서울시 등 필요한 부처와 상시 협조하고 있다”고 21일 밝혔다.

지방법원의 한 현직 판사는 “처음 본다는 판사도 있을 정도로 이런 조건이 붙은 집회 결정 허가문은 드물다. 실제 집회에서 이 조건들이 잘 지킨다면 집회 허가의 새로운 표준이 될 수 있다”면서도 “광화문에서 방역수칙을 어긴 집회가 열린 전례가 있는 만큼 개천절 집회는 이번 경우와 다른 판단이 내려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심석용·박태인 기자 shim.seok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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