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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손해용의 시시각각

홍남기, 소신 접는 게 ‘소신’ 됐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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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손해용 기자 중앙일보 경제부장
손해용 경제에디터

손해용 경제에디터

지난해 가을,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총선 차출설이 확산할 때 일이다. 공식 자리에선 “경제 살리기가 우선”이라며 출마 계획이 없다는 입장을 여러 번 강조했다. 하지만 편한 지인들을 만날 때는 정치에 뜻이 없다면서도 “단 하나 예외가 있다”며 결이 다른 얘기를 하곤 했다. “문재인 대통령께서 요청하신다면 출마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앞으로의 거취는 자신을 임명한 문 대통령의 뜻에 두말하지 않고 따르겠다는 의미다. 그러면서 “만일 정치를 한다면 제대로 할 것이고, 그러려면 3선·4선까지는 해야 하지 않겠나”라고도 했다. ‘물고기를 잡아 오라면 물을 퍼낸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꼼꼼하고 완벽한 그의 스타일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처음에는 반대하다 결국엔 찬성 #반복되니 ‘홍두사미’ 말까지 나와 #아마추어 정책 맞서 쓴소리해야

총선 차출설은 문 대통령이 “나라가 어려우니 경제문제 해결에 총력을 기울여 달라”고 주문하면서 없던 일이 됐다. 대신 그는 이달 말 역대 두 번째 장수(長壽) 기재부 장관(660일)이라는 타이틀을 눈앞에 두게 됐다. 현 정권에 대한 충정과 근면·성실함이 그의 롱런 비결로 꼽히는 건 당연하다.

그는 2018년 취임 때부터 ‘예스맨’이라는 별칭이 따라다녔다. 전임 김동연 부총리가 하도 청와대와 각을 세우니 그를 경제사령탑에 앉혔다는 얘기도 나왔다. 홍 부총리는 청와대나 여당의 정책 결정 과정에서 끌려가는 경우가 많았다. 정치인 출신인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이 기재부 소관인 부동산 세금에까지 오지랖을 펼친 게 대표적인 예다.

지난 4월에는 ‘노맨’으로 변신하면서 그의 ‘시즌2’를 여는가 싶었다. 1차 긴급재난지원금을 전 국민을 대상으로 확대하자는 여당의 요구에 ‘선별 지급하자’고 맞서면서다. 처음엔 소득 상위 50%는 효과가 제한적이라고 하던 그는 청와대·여당과 협의 과정을 거치면서 대상을 소득 하위 70%로 늘리더니, 결국에는 ‘전 국민 지급’으로 입장을 선회했다.

이후에도 비슷한 일이 반복됐다. 지난달 문 대통령의 부동산시장 감독기구 설치 검토 주문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하더니 이달 ‘부동산거래분석원’을 설치하기로 했다. 2차 긴급재난지원금과 4차 추경에 대해서도 지난달에는 “검토하고 있지 않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지만, 결국 이달 “추가 지원이 불가피하다”며 백기를 들었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을 40% 안팎에서 관리하겠다”는 얘기도 빛이 바랜 지 오래다. 이처럼 처음에는 반대하다가 소신을 접는 일이 되풀이되면서 관가에서는 용두사미라는 말을 빗대 ‘홍두사미’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문 정부의 정책 결정 권한은 정치인 출신 참모에게 쏠려 있다. 노무현 정부의 학습효과다. 지금 청와대·여권 요직에 있는 86세대 운동권들은 노 정부가 미완의 개혁에 그친 원인이 관료들의 발목잡기 탓이었다고 여긴다. 문제는 이념에 편향된 참모들의 역량·실력 부족이다. 국가 재정을 허물고 시장경제를 흔드는 아마추어 정책을 남발한다. 전문성과 현장 경험을 갖춘 경제관료들의 ‘쓴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에 홍 부총리의 이런 모습은 무소신·무책임으로 비칠 수 있다.

김대중 정부 시절 경제정책을 진두지휘했던 진념 전 부총리는 “군사정권 시절 군 장성들이 권총을 차고 와 예산을 더 달라고 위협해도 까딱하지 않았다”는 말을 자주했다. “세금을 지키는 일인 만큼 권력의 압박에도 아니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뚝심을 가져야 한다”는 게 그의 변함없는 소신이다. 진 전 부총리가 지금도 기획재정부 후배들 사이에서 거목으로 평가받는 이유다.

홍 부총리가 10년 뒤 기재부 후배들의 자신에 대한 평가가 어떨지 스스로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윗선의 뜻을 거스르지 않던 무색무취의 순치형 부총리’로 불릴지, 아니면 ‘국가 경제의 버팀목으로 정치권의 선심정책에 맞서 제 목소리를 낸 소신 있는 부총리’로 불릴지 말이다. ‘인품과 덕망을 갖춘’ 그를 아끼는 마음에서 하는 얘기다.

손해용 경제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