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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중국어 유창한 청왕녀, 일본의 중국 침략전 기획 참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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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4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44〉

1932년 겨울 도쿄에 도착한 리튼조사단 일행. 왼쪽 넷째가 단장인 전 영국 총독 리튼. [사진 김명호]

1932년 겨울 도쿄에 도착한 리튼조사단 일행. 왼쪽 넷째가 단장인 전 영국 총독 리튼. [사진 김명호]

1927년 여름 가와시마 요시코(川島芳子)는 일본을 떠났다. 어린 시절을 보낸 뤼순(旅順)에 정착했다. 양부 가와시마 나니에(川島浪速)는 요시코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관동군 참모장과 펑톈(奉天) 총영사 요시다 시게루(吉田茂)에게 편지를 보냈다. “10년 전 양녀의 생부 숙친왕(肅親王)과 만·몽독립군을 일으킨 몽고 장군 바브자브의 아들 간주르자브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마치고 다롄(大連)에 주둔 중이다. 숙친왕은 바브자브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자식들 대에도 인연이 계속되기를 염원했다.” 그해 가을 다롄의 야마도 호텔에서 관동군 참모장이 주재한 요시코와 간주르자브의 결혼식이 열렸다.

요시코, 야심 없는 남편에게 불만 #일본 가서 젊은 장교들과 어울려 #상하이의 일 특무기관장과 밀착 #중 노동자 부추겨 폭력 사태 유도 #일 군부, 만주국 출범 공로로 대우 #국민당 고위 간부에게 접촉 시도

요시코는 남편에게 불만이 많았다. 양부에게 편지를 보냈다. “간주르자브는 정치적 야심이 없다. 생부의 간절한 염원을 계승할 재목이 못 된다.” 시동생 정주르자브는 좋아했다. 군에 복무하는 간주르자브는 주로 부대에서 먹고 잤다. 정주르자브는 경찰 간부였다. 시간이 많았다. 퇴근 후 형수와 산책하고 춤도 췄다. 한 번 만나면 다섯 끼를 함께할 정도로 가까워졌다. 눈치를 챈 관동군 정보참모가 정주르자브를 진짜 일본 여자와 결혼시켰다. 요시코는 예쁘고 맹한 20대 초반의 만주 꾸냥을 물색했다. 적합한 여자가 나타나자 곱게 단장시켜 남편에게 데리고 갔다.

만주 처녀 데려와 “이 여자와 살아라”

1차 상하이 사변은 5월 5일 정전협정으로 흐지부지 끝났다. 5년 후 2차 상하이 사변이 벌어졌다. 1937년 11월 상하이에 입성하는 일본군을 환영하러 거리에 나온 일본 교민들. [사진 김명호]

1차 상하이 사변은 5월 5일 정전협정으로 흐지부지 끝났다. 5년 후 2차 상하이 사변이 벌어졌다. 1937년 11월 상하이에 입성하는 일본군을 환영하러 거리에 나온 일본 교민들. [사진 김명호]

남장하고 낯선 여자와 나타난 요시코와 마주한 간주르자브는 넋 나간 사람 같았다. 요시코는 한마디 하고 자리를 떴다. “너와는 맞는 게 하나도 없다. 우리의 인연은 끝났다. 이제부터 나는 여자가 아니다. 앞으로 이 여자와 살아라.” 대답은 들을 필요도 없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일본으로 돌아온 요시코는 도쿄의 큰오빠 저택에 짐을 풀었다. 해만 지면 육군회관으로 갔다. 참모본부의 젊은 장교들과 어울렸다. “일본이 살 길은 조선에 이은 만주와 몽고 진출”이라며 기염을 토하던 젊은 장교들은 일본어와 중국어가 유창한 청나라 왕녀에게 환호했다.

1930년 벽두, 중국통 다나카 류키치(田中隆吉. 훗날 정보원 양성기관 나카노학교 교장 역임)가 상하이 주재 특무기관장으로 부임했다. 요시코는 다나카와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다나카와 밤낮으로 의기투합했다. 일본 군부가 기획한 중국 침략의 전초전인 ‘1차 상하이 사변’의 계기를 만들었다.

만주국 군복을 착용한 가와시마 요시코. [사진 김명호]

만주국 군복을 착용한 가와시마 요시코. [사진 김명호]

1932년 1월 초 참모본부의 전화를 받은 다나카는 요시코를 불렀다. 일본 돈 뭉치 건네며 구체적인 계획을 짜서 실시하라고 부탁했다. 요시코는 일본 일련종(日蓮宗) 승려 2명과 신자 3명을 공동조계 동쪽의 중국인 구역에 있는 공장(三友實業)으로 보냈다. 사달을 일으키라며 시주도 듬뿍했다. 노동자들의 조련을 참관하던 승려와 신도들이 돌을 던지며 싸움을 걸었다. 격분한 노동자들이 가만있지 않았다. 요시코에게 매수당한 날랜 싸움꾼들이 노동자들 틈에 섞여 있었다. 일본인 5명을 두들겨 팼다. 1명이 사망하고 1명은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나머지 3명은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경찰도 매수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범인 체포에 실패했다. 상하이 주둔 일본군은 중국 노동자가 구성원인 노동자위대 소행이라며 중국 정부를 압박했다. 결과는 1월 28일 일본군과 중국군의 충돌로 번졌다.

관동군 요청으로 청 황후 탈출시켜

1932년 2월 16일 만주국 집정(執政)취임식을 마친 푸이. 황제 취임은 2년 후에 했다. [사진 김명호]

1932년 2월 16일 만주국 집정(執政)취임식을 마친 푸이. 황제 취임은 2년 후에 했다. [사진 김명호]

관동군 지휘부는 요시코의 솜씨를 인정했다. 자금성에서 쫓겨나 톈진에 체류 중인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는 다롄으로 탈출시켰지만 황후 완룽(婉容·완용)은 톈진에 있었다. 푸이는 완룽이 없으면 못 사는 성격이었다. 관동군 정보참모는 완룽의 톈진 탈출을 요시코에게 맡겼다. 요시코는 사촌 푸이를 안심시키고 톈진으로 갔다.

완룽은 모험을 즐기는 철부지였다. 요상한 복장에 원숭이 한 마리와 여장한 남자 수행원 대동한 요시코에게 푹 빠졌다. 별것도 아닌 소문이 퍼졌다. “숙친왕의 14번째 딸이 친구와 함께 완룽을 방문했다. 저녁 잘 먹고 잠든 친구가 심장병으로 급서했다.” 며칠 후 완룽을 실은 관이 톈진항을 떠났다. 다롄에 도착한 완룽은 황홀한 모험에 만족했다. 생모의 유품인 비취 목걸이를 요시코에게 선물했다.

푸이를 내세워 만주국을 출범시킨 관동군은 요시코를 우대했다. 안국군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소장 계급까지 줬다. 안국군은 정규군이 아니었다. 도박장과 유흥업소, 사창가 사정에 밝은 정보꾼이 대부분이었다. 만주의 특수성 때문에 유용한 정보 수집이 가능했다.

만주를 점령한 일본이 만주국을 수립하자 국제연맹이 리튼조사단을 파견했다. 요시코는 안국군에서 전직 소매치기들을 긁어모았다. 열차로 이동 중인 조사단의 짐 보따리에 든 조사보고서를 감쪽같이 빼냈다.

요시코는 국민당에도 신경을 썼다. 국민당 중앙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군통)을 이끌던 다이리(戴笠·대립)와 접촉을 시도했다. 이름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천하의 다이리가 자신을 흠모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상상 못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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