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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왕조 부활 꿈꾼 숙친왕, 힘 빌리려 일본 짝사랑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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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3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43〉

소녀 시절 가와시마 요시코는 육군대학 교관 도조 히데키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1935년 10월 10일 밤, 만주국 수도 신징(新京)에 도착한 관동군 헌병사령관 도조 히데키(맨 앞).[사진 김명호]

소녀 시절 가와시마 요시코는 육군대학 교관 도조 히데키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1935년 10월 10일 밤, 만주국 수도 신징(新京)에 도착한 관동군 헌병사령관 도조 히데키(맨 앞).[사진 김명호]

1900년 5월, 8국 연합군이 베이징에 입성했다. 서태후는 황급히 자금성을 빠져나왔다. 산시(山西)성 경내에 들어서자 숨통이 트였다. 먼저 와있던 숙친왕 산치(善耆·선기)를 불렀다. “베이징으로 돌아가라. 리훙장(李鴻章·이홍장)과 함께 뒷일을 수습해라.”

청 망하자 상인으로 변장한 숙친왕 #일본 헌병들 경호 속 베이징 탈출 #만·몽독립론 외친 통역사 가와시마 #숙친왕과 자주 머리 맞대고 밀담 #동북 3성 아우른 대제국 건설 야망 #일 영사관·군 제동으로 거사 실패

숙친왕은 일본군과 교섭에 나섰다. 일본군 통역 가와시마 나니와(川島浪速)와 죽이 맞았다. 숙친왕의 열아홉째 아들 센룽(憲容·헌용)의 구술을 소개한다.

“가와시마는 소년 시절 중·조·일 세 나라가 연합해야 한다는 ‘흥아회(興亞會)’의 주장에 입이 벌어졌다.

가와시마와 의형제 맺고 딸을 양녀로 보내

가와시마 요시코는 복잡한 시대에 복잡한 가정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성장했다. 중학 시절 이미 일본인 체취가 물씬 나는 중국인이었다. [사진 김명호]

가와시마 요시코는 복잡한 시대에 복잡한 가정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성장했다. 중학 시절 이미 일본인 체취가 물씬 나는 중국인이었다. [사진 김명호]

16살 때 도쿄 외국어학원에 들어가 중국 고전과 중국어에 매달렸다. 1886년, 22살 때 상하이에 잠입했다. 화동지역의 정보를 수집하고 해안선을 측량했다. 군 배치 상황도 지도로 만들었다. 만주와 내몽고를 중국에서 분열시키자며 ‘만·몽 독립론(滿·蒙獨立論)’을 제창해 군부의 주목을 받았다. 청일전쟁 때는 통역으로 종군했다. 식민지 대만에서 정보 업무에 종사하던 중, 베이징 공격을 앞둔 일본군의 요청으로 8국 연합군에 합류했다. 가와시마는 청나라 정부의 항복을 압박했지만, 만주와 몽고 귀족들의 저택은 철저히 보호했다. 숙친왕의 왕부(王府) 외에는 손상된 곳이 없었다. 왕공(王公)들에게 체면이 선 숙친왕은 가와시마에게 호감이 갔다. 허구한 날 머리 맞대고 밀담을 나눴다. 부인들 앞에서 의형제도 맺었다. 1906년 딸이 태어나자 6년 후 양딸로 주겠다고 약속했다.”

8국 연합군이 철수하자 베이징으로 돌아온 서태후는 숙친왕을 중용했다. 숙친왕은 개혁을 입에 달고 다녔다. 목청만 요란했지 되는 일은 없었다. 어설픈 개혁은 정치가들의 무덤이라는 교훈만 남겼다. 세금을 잘 거둬들이다 보니 서태후의 신임은 여전했다. 왕푸징에 목욕탕과 시장도 만들었다.

1911년 10월, 남방의 혁명군이 깃발을 올렸다. 4개월 후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부의)가 퇴위하고 청 왕조는 멸망했다. 숙친왕은 현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퇴위 조서에 서명을 거부했다. 만·몽 독립을 구상하던 가와시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숙친왕을 설득했다. “일본군 관할지역인 뤼순(旅順)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청 황실의 복벽(復辟)을 도모하자. 일본 군부와 관동도독부의 지지가 관건이다.”

상인으로 변장한 숙친왕 일행은 일본군 대좌가 이끄는 사복 헌병들의 경호를 받으며 베이징을 탈출했다. 뤼순에 안착하자 6년 전 가와시마에게 했던 약속을 지켰다. 열넷째 딸 진비후이(金壁輝·금벽휘)의 양육을 부탁했다. 6살 난 진비후이가 알아듣건 말건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이제부터 너는 일본사람이다. 천황폐하에게 충성해라.”

숙친왕의 고달픈 일본 짝사랑은 끝이 없었다. 메이지 천황 무쓰히토가 죽자 3일간 상복을 입었다. 좋아하는 돼지고기도 입에 대지 않았다. 다이쇼 천황 요시히토 즉위 날은 더 심했다. 엄동설한에 바이위산(白玉山)에 올랐다. 러·일전쟁 때 중국에서 전사한 일본군의 납골당에 술잔 바치며 제를 올렸다. 가와시마가 오는 날은 일찍 부인들 데리고 문 앞에 나가 기다렸다. 목적은 단 하나, 일본의 도움으로 몽고장군 바브자브와 연합해 베이징을 점령한 후 화북지역과 몽고, 만주(동북 3성)를 포괄하는 대제국을 건설하고, 자금성에서 쫓겨나 텐진(天津)에 있는 푸이를 황제로 옹립한다는 것 외에는 없었다. 자금도 직접 마련했다. 소유하고 있던 농지와 삼림, 금광, 목장, 탄광을 담보로 일본의 금융재벌 오쿠라키 하치로(大倉喜八郞)에게 거액을 빌렸다. 미쓰비시(三菱)도 숙친왕과 가와시마의 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토비 2000여 명 다롄서 훈련시켜

여고 시절 오빠, 동생, 양부와 함께 꽃구경 나온 가와시마 요시코(오른쪽 두번째). [사진 김명호]

여고 시절 오빠, 동생, 양부와 함께 꽃구경 나온 가와시마 요시코(오른쪽 두번째). [사진 김명호]

숙친왕은 노동자로 위장한 토비(土匪) 2000여 명을 다롄(大連)에서 훈련시켰다. 동북의 일본 영사관과 주둔군이 거사에 제동을 걸었다. “전쟁이 뭔지 모르는 오합지중(烏合之衆)이다. 성공은커녕 일본의 국위(國威)만 손상시킬까 우려된다. 장쭤린(張作霖·장작림)과 손을 잡는 것이 제국에 도움이 된다.” 정확한 분석이었다. 숙친왕의 상대는 베이징의 북양정부가 아닌 장쭤린의 동북군이었다. 군을 출동시킨 바브자브는 중도에 퇴각했다. 하얼빈 인근에서 장쭤린의 부하들에게 전멸당했다.

실의에 빠진 숙친왕은 자녀들에게 희망을 걸었다. 중국의 공직은 물론, 국민 되기도 포기하라며 외국 유학을 보냈다. 영국, 독일, 벨기에, 프랑스에 골고루 보내면서 한 나라에 2명 이상은 보내지 않았다. 일본은 예외였다. 21명을 일본학교에 입학시켰다. 사는 도시도 모두 제각각이었다.

일본인 가와시마 요시코가 된 진비후이는 혹독한 군국주의 교육을 받았다. 무용보다 승마를 즐기고, 사격과 검도에 열중했다. 복장도 남장이 편했다. 예쁘다는 말보다 미소년 소리 들을 때가 더 좋았다. 사관생도들과 자주 어울렸다. 다들 시시했다. 틈만 나면 육군대학 교관 도조 히데키(東条英機)를 찾아가 러·일전쟁 얘기를 들었다.

성년식 무렵 양부가 주책을 떨었다. 요시코는 살기가 싫어졌다. 시 한 편으로 유서를 대신했다. “집이 있어도 가지 못하고, 눈물이 흘러도 닦을 곳이 없다. 법은 있어도 공정하지 못하니, 억울해도 하소연할 곳이 없다.” 자살에 실패한 요시코는 황제에서 평민으로 전락한 사촌 푸이가 보고 싶었다. 귀국을 결심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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