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이현상 논설위원이 간다

‘돼지 명인’이 모였다 “1%의 혁신 가능성을 찾아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4면

이현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실장

양돈 고수들의 ‘열공’ 현장

11일 서울 서초구 영동농협 내곡지점 6층 카페에 모인 양돈 마이스터들이 실시간 화상을 통해 네덜란드 바헤닝언 대학의 세계적 양돈 전문가 로버트 호스테 박사의 강의를 듣고 있다. 국내 13명의 양돈 마이스터 중 7명이 이 수업에 참여하고 있다. 이현상 기자

11일 서울 서초구 영동농협 내곡지점 6층 카페에 모인 양돈 마이스터들이 실시간 화상을 통해 네덜란드 바헤닝언 대학의 세계적 양돈 전문가 로버트 호스테 박사의 강의를 듣고 있다. 국내 13명의 양돈 마이스터 중 7명이 이 수업에 참여하고 있다. 이현상 기자

11일 서울 서초구 영동농협 내곡지점 6층 카페에 7명의 농민이 모였다. 방역 수칙에 따라 체온을 잰 뒤 마스크를 하고 띄엄띄엄 자리를 잡은 이들은 곧 ‘열공 모드’에 들어갔다. 가까이선 경기도 안성·이천, 멀리서는 경남 거창에서 올라온 ‘양돈 마이스터’들이다. 농림축산식품부는 15년 이상 경력의 전문 영농인 중 필기시험과 역량평가, 현장심사 등의 절차를 거쳐 ‘농업 마이스터’를 지정한다. 양돈 부문에서는 전국 5000여 돼지 농가 중 단 13명만 이 타이틀을 갖고 있다. 한마디로 양돈에 관해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돼지 명인(名人)’들이다.

‘양돈 마이스터’ 매달 스터디 모임 #“낮은 생산성 극복이 가장 큰 과제 #과도한 정부 보조가 혁신을 방해” #네덜란드 전문가의 따끔한 충고

이들이 참여한 프로그램은 네덜란드 바헤닝언(Wageningen) 대학과 공동으로 진행하는 ‘바헤닝언 선진 농업 마스터 클래스(WAAM)’. 민승규 한경대 석좌교수(전 농촌진흥청장)와 김창길 서울대 특임교수(전 한국농촌경제연구원장)가 기획, 지난 5월부터 매달 공부 모임을 갖고 있다. 네덜란드 쪽에서는 세계적 양돈 경제학자인 바헤닝언 대학의 로버트 호스테 박사팀이 실시간 화상을 통해 노하우를 전수하고 있다. 이날의 화상 회의 주제는 돼지 농장의 차단 방역 관리. 호스테 교수팀의 두 전문가가 나와 아프리카 돼지 열병(ASF)의 방역 주의점과 네덜란드 현지 농장의 방역 시스템을 영상으로 소개했다.

한국 양돈의 문제, 낮은 생산성

한국인은 쌀 다음으로 돼지고기를 많이 먹는다. 2018년 농업 생산액 통계를 보면 돼지 생산액은 7조1000억 원으로 쌀 생산(8조4000억원)에 이어 2위다. 그 뒤로 한우(4조8000억원), 닭(2조3000억원), 우유(2조1000억원)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산업 규모에도 불구하고 한국 양돈업의 현주소는 녹록지 않다. 이날 화상 수업에 앞서 특별 강연을 한 농협 축산경제(옛 축협) 김태환 대표는 “한국 양돈업의 가장 큰 문제는 선진국에 비해 낮은 생산성, 양돈 농가들의 양극화, 소비자들의 특정 부위 선호 현상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고 말했다.

네덜란드와 한국의 양돈 생산성

네덜란드와 한국의 양돈 생산성

양돈업 생산성을 재는 대표적 지수는 PSY와 MSY다. PSY(Piglet per Sow per Year)는 어미돼지 한 마리가 1년에 낳는 새끼돼지의 수를 말하고, MSY(Marketed per Sow per Year)는 이런 새끼돼지 중 실제 시장에 나오는 마릿수를 뜻한다(돼지는 태어난 지 대략 170일 만에 출하된다).

지난해 한국의 평균 PSY는 21.3 마리. 네덜란드의 30.9 마리와 비교하면 열 마리 가까이나 적다. 출하 두수를 따지면 차이가 더 벌어진다. 한국의 평균 MSY가 18.0인 데 비해 네덜란드는 28.8. 한국에서는 출하되기 전 세 마리 정도가 죽지만, 네덜란드에서는 단 두 마리가 죽는다는 이야기다. 사료 효율을 따져도 네덜란드에 비해 크게 뒤진다. 한국에선 1㎏의 고기를 얻기 위해서 3.2㎏의 사료를 먹여야 하지만, 네덜란드는 2.54㎏이면 충분하다. 가격 경쟁력 등에서 수입 돼지고기에 밀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사실 대규모 양돈 농가만 따지면 생산성이 크게 밀리지는 않는다. 양돈 마이스터의 경우, 평균 MSY가 25~26두에 이르러 유럽 농가와 맞먹는 수준이다. 그러나 하위 10% 농가의 경우 이의 절반에도 채 미치지 못해 전체 평균을 갉아먹고 있다. 기술도 떨어지지만, 시설이 낙후돼 질병 관리나 방역에 취약하기 때문이다. 소비자 선호가 삼겹살과 목살에 워낙 치우쳐 있어 수출이나 육가공 등으로 기타 부위 수요를 늘려야 하는 과제도 있다.

네덜란드에서 보내온 쓴소리

WAAM 과정의 네덜란드 측 교장인 바헤닝언대 호스테 박사는 경력 30년의 전문가다. 전 세계 양돈업자들과의 공동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사육 기술 등에 대해 조언해주고 있다. 2014년부터 한국과도 인연을 맺고 국내 양돈장을 찾아 한국 양돈산업을 관찰해왔다. 그가 과정을 개설하면서 한돈 산업의 특징을 10가지로 요약했다. 우리나라 양돈 마이스터들에게 보내는 자극제였다.

이 중 몇 가지를 추리면 이렇다. ▶과학기술 수준이 높지만, 이를 농업에 제대로 접목하지 못하고 있다 ▶농장 생산성이 낮다 ▶전산관리시스템 수준이 낮다 ▶최저임금 같은 노동비용이 많이 든다 ▶농업교육이 분산돼 있어 비효율적이다 ▶동물복지와 차단 방역에 더 집중해야 한다.

호스테 박사는 특히 “한국 정부의 보조금이 농가의 혁신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한국 정부의 농가 보호 수준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중 1위다. 농업 생산물의 시장가치에 정부 예산의 몫을 반영하는 ‘농업생산자 지원 추정치(PSE)’가 51%에 달해 유럽(20%)의 두배 반이다. 네덜란드가 ‘무자비할 정도’로 적은 지원으로 농가의 혁신을 유도하는 상황과는 대비를 이룬다. 호스테 박사는 “정부 보조금은 단계적으로 줄여나가고, 대신 농촌 발전에 필요한 인프라에 투자해야 농업 혁신이 빨라질 수 있다”고 충고했다.

탈출구는 혁신

결국 탈출구는 혁신이다. ‘양돈 고수(高手)’들이 정기 모임을 갖는 것도 혁신에 대한 목마름 때문이다. 이날 마이스터들은 화상 수업 전 국내 전문가들로부터 ‘동물 복지’와 ‘AI 및 빅데이터 활용 방안’ 강의를 들었다. 둘 다 최근 국제 양돈업계의 관심 주제들이다. 강의 뒤 나오는 토론과 질문을 영어로 정리해 네덜란드에 넘기면 다음 달 화상 수업에서 코멘트를 얻는다. 일종의 선행 학습을 하는 셈이다.

사실 한국은 기온 연교차가 커 유럽보다 훨씬 커 양돈에 불리한 환경이다. 환기나 기온 유지에 그만큼 더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수업에 참여한 경기도 안성 소재 고바우농장의 설수호 부사장은 “기술 자체로만 따지면 유럽에 크게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한다”면서도 “국내외 전문가 간 수준 높은 토론과 정보 교환을 통해 혁신을 위한 자극과 통찰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

과정의 한국 측 교장을 맡은 김창길 교수는 “마이스터들은 양돈 농가 중 상위 1% 안에 드는 부농들이지만, 선진 기술과 트렌드 습득에 목말라 하고 있다”며 “혁신의 가능성을 1%라도 더 찾자는 것이 이 공부 모임의 목적”이라고 말했다. WAAM 과정의 산파 역할을 한 민승규 교수는 “선진 농업 교육이라고 하면 흔히 해외 견학을 생각하지만, 빠듯한 일정 등의 이유로 피상적 수준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며 “지속적인 토론과 질문을 통한 화상 수업이 더 깊이 있고 효과적인 방식이라고 생각해 이런 프로그램을 만들게 됐다”고 말했다.

김동연 전 부총리의 ‘돼지 사랑’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가 경기도 이천 소재 양돈 농장에서 새끼돼지를 안아 보고 있다. [한국벤처농업대학]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가 경기도 이천 소재 양돈 농장에서 새끼돼지를 안아 보고 있다. [한국벤처농업대학]

이날 수업에는 뜻밖의 인사가 모습을 나타냈다. 특별 강연을 위해 마이크를 잡은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 2018년 말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을 퇴임한 뒤 정치권의 ‘러브 콜’을 마다했던 그는 올 초 사단법인 ‘유쾌한 반란’을 만들어 농어촌과 벤처·중소기업 현장을 찾아 혁신 정신을 강조해오고 있다. 지난 5월 민승규 교수의 초청으로 WAAM의 킥 오프 미팅에서의 강연이 계기가 돼 공부 모임의 고문을 맡게 됐다. 지난달 5일에는 마이스터 중 한 명인 엄문일 대표가 운영하는 경기도 이천 설봉농장을 찾아 격려했고, 이틀 뒤 마이스터들을 서울로 초청해 자장면 간담회를 열기도 했다.

김 부총리는 이날 강연에서 “퇴임 후 농어촌 민생현장을 돌며 느낀 점 중 하나는 농업 혁신의 필요성”이라며 “양돈에서도 농업 부산물을 농사에 다시 쓰는 순환 농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부의 정책 자금도 순환농업이나 유기농업 생태계 조성을 돕는 방향으로 쓰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김 부총리는 요즘 주력하고 있는 ‘소셜 임팩트 기업’의 지원 활동 구상도 소개했다.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벤처와 스타트업을 일컫는 개념으로, 일반적인 ‘사회적 기업’과 비교하면 수익 재창출을 통한 지속 가능성에 무게가 실려 있다. 그는 “농어업이든 제조업이든 서비스업이든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혁신과 기업가 정신이 필요하다”며 “이런 기업의 모임인 ‘소셜 임팩트 포럼’ 발족식을 21일 연다”고 말했다.

이현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