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쇼인줄 알았는데···메르켈 "푸틴 답해라" 나발니 테러 분노 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러시아 정부만이 답할 수 있는 심각한 문제”

 독일이 반(反)푸틴 인사 알렉세이 나발니의 독극물 중독 사건을 두고 연일 러시아를 압박하고 있다. 나발니 체내에서 독극물이 검출됐다는 발표까지 나오자 그 수위는 더 세졌다.

獨 "나발니 체내서 노비촉 중독 증거 나와" #메르켈 두 차례 기자회견 이례적…러시아 책임론 꺼내 #크림반도·벨라루스…러 영향력 견제 속내도 #메르켈 "러시아 천연가스관 사업 협력과 나발니 사건은 별개"

독일의 선장에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있다. 평소 신중하고 온화한 모습을 보이는 메르켈이지만 이번 만큼은 단호하고, 강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메르켈 총리가 러시아의 독극물 공격 의혹 사건과 관련해 두 차례나 직접 기자회견을 연 것도 이례적이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2일(현지시간) 기자회견을 열고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 알렉시아 나발니는 "살인미수의 희생자"라며 "러시아 정부만이 답할 수 있는 심각한 문제"라고 말했다. 독일 총리가 직접 나서서 러시아 독극물 테러 의혹에 발언한 건 이례적이다. [AP=연합뉴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2일(현지시간) 기자회견을 열고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 알렉시아 나발니는 "살인미수의 희생자"라며 "러시아 정부만이 답할 수 있는 심각한 문제"라고 말했다. 독일 총리가 직접 나서서 러시아 독극물 테러 의혹에 발언한 건 이례적이다. [AP=연합뉴스]

러시아가 나발니를 독일로 보낸 까닭은? 

사건 초반 메르켈의 러시아 압박은 ‘보여주기 식’이라는 분석이 우세했다. 독일에 러시아는 정치적으로는 경계 대상이지만, 경제적으로는 협력 관계라는 이유에서다.

미국의 반발 속에 독일과 러시아가 함께 진행 중인 해저 천연가스관 연결사업 ‘노르트 스트림 2’가 주요 원인으로 지목됐다. 양국이 일정 부분 협력해야 하는 만큼 이번 사건을 대결 구도로 비화시키진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었다.

독일 일간 디벨트는 나발니 사건을 둘러싼 독일과 러시아의 반응을 “프로그램된 갈등”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러시아 시베리아에서 모스크바로 향하던 비행기에서 쓰러진 나발니가 8월 21일(현지시간) 러시아 병원에서 독일 병원으로 이송되고 있다. 메르켈 총리는 나발니를 독일 병원으로 이송하자고 제안하고, 핀란드 대통령을 중재자로 내세워 푸틴 대통령의 협력을 이끈 것으로 전해진다. [EPA=연합뉴스]

러시아 시베리아에서 모스크바로 향하던 비행기에서 쓰러진 나발니가 8월 21일(현지시간) 러시아 병원에서 독일 병원으로 이송되고 있다. 메르켈 총리는 나발니를 독일 병원으로 이송하자고 제안하고, 핀란드 대통령을 중재자로 내세워 푸틴 대통령의 협력을 이끈 것으로 전해진다. [EPA=연합뉴스]

메르켈, 정말 뿔났다

그러나 메르켈의 분위기는 줄곧 심상찮다. 메르켈은 지난달 20일 나발니가 의식불명에 빠졌다는 소식이 나온 직후부터 발 빠르게 움직였다.

나발니 사건을 접한 지 2시간 만에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열고 사건 경위 조사 촉구를 이끌더니 이틀 만에 나발니를 독일로 이송해 치료했다.

지난달 25일에는 나발니의 독극물 중독 의심 결과가 나오자 이례적으로 독일 외무부 장관과 합동 기자회견도 열고 “철저하고 투명한 조사를 긴급히 요청한다”고 말했다. 2일에는 독일 정부가 “나발니가 신경작용제인 노비촉에 중독된 명백한 증거가 있다”고 발표하자 노골적으로 러시아를 압박했다.

그는 기자회견을 열고 “나발니는 살인미수의 희생자”라면서 “그의 침묵을 원한 누군가가 독극물을 사용했다”고 말했다. 이어 “러시아 정부만이 답할 수 있고, 반드시 답해야 할 매우 심각한 질문이 있다”고 덧붙였다. 러시아 배후설을 넘어 러시아 책임론을 꺼내 든 것이다.

블룸버그 통신은 메르켈이 평소 기자회견에서 차분하고 신중한 단어를 선택하지만 이번 사태에서는 강한 어조를 보인다고 평가했다. 한 독일 정부 소식통은 메르켈이 기자회견을 통해 “이번 사건을 매우 심각하게 보고 있다”는 메시지를 크렘린 궁에 전한 것이라고 말했다.

독일은 2일 나발니가 신경화학물질인 노비촉에 중독됐다는 증거가 발견됐다고 밝혔다. [AP=연합뉴스]

독일은 2일 나발니가 신경화학물질인 노비촉에 중독됐다는 증거가 발견됐다고 밝혔다. [AP=연합뉴스]

“메르켈, 러시아 압박 속내 따로 있다”  

메르켈은 왜 이토록 러시아의 독극물 공격 의혹에 분노하는 걸까. 서구 언론은 그동안 독일을 상대로 한 러시아 측의 공작 의혹에 칼을 꺼내든 것이라고 분석했다.

지난해 1월 발생한 독일 연방하원 의회 해킹 사건과 지난해 8월 베를린 시내에서 발생한 조지아인 살해 사건이 대표적이다. 두 사건 모두 용의자들이 러시아 정보기관 정찰총국(GRU) 요원으로 밝혀졌지만, 러시아는 혐의를 부인하며 모르쇠로 일관했다.

독일은 러시아 외교관을 추방하고, 러시아 대사를 초치하는 등 강력하게 대응했지만, 양국 관계는 이미 틀어진 상황이다. 메르켈은 해킹 사건과 관련해 “나는 매일 러시아와 신뢰를 쌓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솔직히 (이 사건이) 나를 아프게 했다”며 불만을 표출하기도 했다. 다만 당시에는 이 문제를 외교 갈등으로까지 끌고 가지는 않았다.

크림반도 병합·벨라루스 입김…러시아 견제 위해?

이제는 러시아의 팽창 정책을 견제해야 할 때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러시아가 크림반도 강제 병합과 벨라루스 정국 개입을 발판으로 유럽 내 영향력을 넓히려 하자 불안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이미 독일은 러시아의 세력 확장에 민감한 반응을 보여왔다. 지난 6월 러시아의 크림반도 강제 병합을 이유로 내려진 유럽연합의 경제 제재를 1년 연장하는 것에 독일이 앞장섰다.

지난해 12월 러시아 소치에서 벨라루스 루카셴코 대통령과 만난 블라드미르 푸틴 대통령(가운데). [EPA=연합뉴스]

지난해 12월 러시아 소치에서 벨라루스 루카셴코 대통령과 만난 블라드미르 푸틴 대통령(가운데). [EPA=연합뉴스]

한 달 뒤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러시아를 가입시키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구상안에도 누구보다 먼저 나서서 반대했다. 지난해 1월 발생한 해킹 사건과 관련해서도 EU 차원에서 러시아를 제재할 방안을 준비 중이다.

여기에 최근 불거진 벨라루스 시위 사태로 긴장은 더 고조됐다. 민중시위로 혼란스러운 벨라루스에 러시아가 군사적 지원을 약속하자 독일이 EU와 함께 반기를 든 것이다.

푸틴 대통령은 “벨라루스 내정에 어떤 외부 간섭도 용납할 수 없다”면서 서방 국가는 벨라루스 사태에 개입하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메르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메르켈은 푸틴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벨라루스 정부는 시위대에 대한 폭력 사용을 중단하고 루카셴코 대통령은 야권과 대화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독일은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중시하는 인식이 강한 만큼 러시아의 독극물 공격 의혹을 인권 문제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메르켈, 강경 대응 예고

이번 사건은 앞으로 독일을 중심으로 한 서방 국가와 러시아의 외교 갈등으로 번질 전망이다.

독일은 우선 이번 조사 결과를 유럽연합(EU)과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유엔 산하 화학무기 금지기구(OPCW)에 전달하겠다는 방침이다. 국제기구에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국제법으로 사건을 다루겠다는 것이다.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독일이 이번 조사 결과를 EU 등에 전달하기로 한 데는 메르켈 총리의 강경하고 원칙적인 입장이 영향을 미쳤다.

메르켈 총리는 나발니 독극물 중독 의혹 사건에 러시아 책임론을 거론하며 국제사회에 공식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앞으로 독일을 중심으로 한 서방국가의 대러시아 압박은 더 거세질 전망이다. [AP=연합뉴스]

메르켈 총리는 나발니 독극물 중독 의혹 사건에 러시아 책임론을 거론하며 국제사회에 공식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앞으로 독일을 중심으로 한 서방국가의 대러시아 압박은 더 거세질 전망이다. [AP=연합뉴스]

당초 독일 의회는 러시아 책임론을 제기하기에는 시기상조라며 우려를 표했다. 오히려 이번 사건을 노르트 스트림2 협상 카드로 내걸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메르켈은 “(의회의 제안은) 적절하지 않다. 나발니 사건과 노르트 스트림2는 별개 문제”라며 선을 그었다고 한다. 앞으로 이번 사건에 대한 러시아의 책임을 추궁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여기에 미국과 영국, 프랑스, EU까지 나서고 있다. 서방국은 과거 반(反)푸틴 인사들이 독극물 공격을 받았던 사건을 언급하며 “러시아 정부는 나발니에게 일어난 일을 반드시 설명해야 할 것”이라고 규탄하고 있다.

한편 러시아는 이날 독일 발표에도 “나발니가 독일로 이송되기 전 러시아 병원에서 한 검진에서 독성 물질은 검출되지 않았다”며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

관련기사

이민정 기자 lee.minjung2@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