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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남정호의 시시각각

끔찍한 유엔사 해체, 안보 허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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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남정호
남정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남정호 논설위원

남정호 논설위원

웨스트포인트 사상 첫 흑인 생도 대장이었던 빈센트 브룩스 전 한미연합사령관. 두 번의 한국 근무에다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를 정도로 알아주는 지한파다. 여간해선 언성을 안 높인다는 그가 지난달 29일 “끔찍하다”란 거친 표현까지 써가며 한국 여권 인사의 발언에 격한 반응을 보였다. “족보 없는 유엔사가 남북관계에 간섭하지 못하게 통제해야 한다”는 송영길 국회 외교통일위원장의 최근 발언에 대한 질문을 받고서다. 브룩스는 “유엔이 창설한 조직을 부정한다는 것 자체가 끔찍한 발언”이라며 최근 국내에서 일고 있는 유엔사 해체 움직임에 일침을 가했다.

정권 핵심서 집요한 작업 진행 중 #유엔사 없인 일본 후방기지 못 써 #해체 아닌 유엔사와 협력 힘써야

코로나19 탓에 주목을 덜 받아서 그렇지 최근 현 정권 핵심부에선 우리 안보의 기둥인 유엔사를 허물기 위한 작업이 집요하게 진행되고 있다. 지난해 말부터 안보 쪽 실세란 실세는 죄다 나서 유엔사 해체를 노래해 왔다. 송 위원장뿐이 아니다. 지난해 9월에는 문정인 대통령 특보가 “남북관계의 가장 큰 장애물은 유엔사”라고 했고, 올 5월엔 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유엔사가) 말도 안 되는 월권을 행사한다”고 비판했다. 지난 6월에는 조세영 외교부 차관까지 나서 “정전협정의 종식을 통한 유엔사의 역할 변화”를 언급했다.

유엔사 해체는 주한미군 철수, 한·미 연합훈련 중단과 함께 북한이 줄기차게 요구해 온 단골 메뉴다. 북한은 유엔사를 겨냥, 지난해 유엔총회에서 ‘유령 조직’이라고, 재작년에는 ‘괴물 같은 조직’이라 비난했다. 송 위원장이 말한 ‘족보 없는 조직’과 비슷하게 들리지 않는가.

이렇듯 집중포화를 받는 유엔사지만 그 실체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작다. 사령관을 포함, 전 직원이 30명 남짓이다. 그럼에도 북한이 없애지 못해 안달하는 까닭은 뭔가. 어느 것도 대신할 수 없는 유엔사의 막중한 역할 때문이다.

유엔사는 존재 자체가 철통 같은 방패다. 우선 한반도에서 전쟁이 날 경우 유엔사가 있어야 우방국들이 바로 달려올 수 있다. 1953년 총성이 멈추자 한국전 참전국들은 귀향을 앞두고 중요한 선언을 한다. “북한이 재침략하면 유엔군 깃발 아래 바로 모이겠노라”고. 이 덕에 제2의 한국전 발발 시 이들에겐 즉각 되돌아올 명분이 있다. 공산 침략에서 남한을 지킨다는 유엔사의 임무가 계속되는 까닭이다.

둘째, 유엔사 없이는 정전협정 자체가 무효가 된다. 정전협정은 유엔군 사령관과 중국 및 북한군 사령관이 당사자가 돼 맺은 협정이다. 이 때문에 체결 당사자가 사라지면 해당 협정도 무효로 한다는 국제법 원칙에 따라 유엔사 없이는 정전협정도 휴지 조각이 된다. 여러 문제점이 있긴 하지만 정전협정은 한반도 평화 유지에 결정적 기여를 한 게 사실이다. 그동안 제2의 한국전이 없었다는 게 그 증거다. 특히 정전협정이 무효가 되면 황해도 코앞에 놓인 백령도 등 서해 5도를 둘러싼 영토 분쟁이 불붙을 게 뻔하다. 자칫 심각한 무력충돌로 이어지지 말라는 법도 없다.

셋째, 일본 내 유엔사 후방기지 7곳을 미군이 마음대로 쓸 수 없게 된다. 현재 미군은 1960년 맺어진 미·일 간 밀약에 따라 한반도 비상사태 시 일본 정부의 사전 양해 없이 7곳의 유엔사 후방기지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 북한이 다시 침략해 올 경우 일본 내 후방기지에서 즉각적인 지원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유엔사 후방기지로 지정된 7곳은 자마·요코스카·후텐마 등 죄다 주일 미군의 핵심 주요 시설들이다. 하지만 이 역시 유엔사가 없어지면 협약이 무효화돼 사용이 어려워진다. 요컨대 유엔사 해체 시 우리 안보에 커다란 구멍이 난다는 얘기다.

백번 양보해 일부 진보 인사들 주장대로 유엔사가 남북 교류에 지장을 준 적이 있다 치자. 그래도 유엔사를 설득해 허가 절차를 간소화하거나 보완하는 게 맞다. 이를 문제 삼아 우리 안보의 대들보 같은 유엔사를 없애자는 건 ‘빈대 잡으려고 초가삼간 태우는 꼴’이다.

남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