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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양성희의 시시각각

논란의 ‘성교육 책 회수 사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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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양성희 논설위원

양성희 논설위원

논란의 책 7종을 읽어 봤다. 김병욱 미래통합당 의원이 비판하고 여성가족부가 교육 현장에서 즉각 회수를 결정한, 성교육 도서 7종 10권 얘기다. 김 의원은 최근 국회 교육위원회에서 여가부의 ‘나다움’ 성교육 추천도서 일부를 비판했다. 성관계를 노골적으로 묘사해 ‘조기 성애화’의 우려가 있고 동성애를 미화·조장한다고 했다. 여가부가 전문가 심사를 거쳐 초등학교 5곳에 배포한 추천서들이다. 여가부는 김 의원 발언 다음 날 “문화적 수용성 논란을 감안한다”며 현장 회수를 결정했다. 직전까지 “덴마크·스웨덴·프랑스·호주·일본 등 여러 나라에서 1970년대부터 출간돼 아동 인권교육 자료로 활용되고 있거나(『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 국제앰네스티의 추천을 받거나(『엄마 인권선언』), 세계 최고 권위의 아동문학상을 수상해(『자꾸 마음이 끌린다면』)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고 했던 책들이다.

일각의 조기 성애화 비판에 굴복 #여가부, 성교육 추천서 회수 결정 #성평등 다양성 직무유기 아닌가

직접 읽어 보니 책들엔 큰 문제가 없었다.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의 성행위 묘사가 직접적·파격적이기는 하지만 자극 아닌 정보 전달에 초점이 맞춰졌다. 초등학생들이 보기에 적나라하다지만 요즘 아이들이 쉽게 접하는, 지천으로 깔린 음습한 인터넷 영상들을 몰라서 하는 얘기다. 일찍 성에 눈뜨는 조기 성애화가 문제가 아니라 조기에 성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게 문제인 시대다. 엄마·아빠가 성관계를 “재미있는 일, 하고 싶어진다”고 한 부분도 문제 삼았는데, 그렇다면 성을 “재미없고 하기 싫은 일”로 가르치라는 말인가.

고정된 성 역할에서 벗어나자는 『엄마 인권선언』, 사랑의 과정을 짚어보는 『자꾸 마음이 끌린다면』에는 동성 커플이 딱 한 장면 나왔는데 그것만으로 ‘불온 딱지’를 붙였다. 이쯤 되면 소수자 혐오다. 물론 여가부의 회수가 시장 퇴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상징적 의미가 크다. 세상과 아이들은 저만치 가는데 시곗바늘을 너무 뒤로 돌렸다. 또 아이들을 애써 ‘무성’의 존재로 묶어 두려는 금욕적 성관념, 혹은 성적 엄숙주의는 우리 사회의 왜곡된 성의식·성문화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금기에서 비틀린, 과잉의 욕망이 자라기 때문이다.

중앙대 김누리 교수는 더 나아가 “성에 대한 죄책감은 민주주의의 적”이라며 “한국의 민주주의가 성숙한 민주주의로 한 단계 더 나아가려면 학교에서 강한 자아를 가진 아이들을 키워내야 하고, 그 핵심은 성교육”이라고 진단한다(『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일종의 정치교육으로서 성교육을 시키는 독일 사례를 소개하며 “성을 부끄러워하며 깊은 죄의식을 내면화해 자아가 약할수록 권위주의적 성격이 되고 권력에 굴종적인 인간이 된다”고 강조한다. 한마디로 성을 자연스러운 욕망으로 ‘오픈’하는 게 개인의 탄생, 민주사회 실현에 필수란 설명이다. 음지에서 쉬쉬하며 잘못 배운 성 관념이 일으킨 수많은 디지털 성범죄, 또 성교육은 아이만 아니라 ‘잘난’ 어른들부터 받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 명망가·권력자들의 미투 릴레이는 어떠한가. 최근 정의당 류호정 의원이 발의한 ‘비동의 강간죄’ 도입안도 결국은 성에 대해 쌍방이 많이 이야기하고 ‘동의’하는 새로운 성문화에 대한 요청이다.

이번 논란은 김병욱 의원 이전에 일부 기독교 단체와 보수 유튜버들이 제기했던 이슈다. 성평등과 다양성, 소수자 인권 증진에 앞장서야 할 여가부가 이에 논리적 대응 한 번 없이 백기 투항한 것은 직무유기다. 여가부의 존재 의의를 묻고 싶다. 동성애 문제도 언제까지 쉬쉬할 일은 아니다. 2018년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참여자 4065명 중 ‘성 정체성’(나는 남자인가, 여자인가), 또는 ‘성적 지향’(어떤 성에 이끌리는가)에 대해 고민한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학생이 각각 26.1%, 30.7%에 달했다. 이미 “우리 아동·청소년에게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은 조장·미화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 삶과 닿아 있는”(한국여성단체연합) 문제란 얘기다.

양성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