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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가 5% 추가 할인 허용하면 서점 1000개 문 닫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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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1호 18면

기로에 선 도서정가제

지난 7일 서울 삼청로 출판문화회관에서 열린 ‘도서정가제 폐지를 우려하는 출판·문화단체 긴급대책회의’ 모습. [뉴시스]

지난 7일 서울 삼청로 출판문화회관에서 열린 ‘도서정가제 폐지를 우려하는 출판·문화단체 긴급대책회의’ 모습. [뉴시스]

도서정가제(이하 도정제)가 다시 문제다. 책 가격의 할인폭을 정가의 15% 이내로 제한하는 제도로, 출간한 지 오래된 구간(舊刊)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해 ‘재판매가격유지제도’라고도 한다. ‘오래된 새 책’을 사고팔 때도 15% 할인율을 적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출판인회의 박성경 유통위원장 #젊은층 여론 의식한 정부 #현행 유지 틀 깨고 방향 전환 #‘도정제’는 서점들 산소호흡기 #출판 다양성 공로 인정해야

‘다시 문제’라고 한 건 이 제도가 심심치 않게 홍역을 치러왔다는 얘기다. 도정제는 2003년 처음 도입됐다. 1990년대 중반 생겨나기 시작한 인터넷 서점의 영향이 컸다. 이들의 염가 공세에 시장 질서가 흔들려 출판 자생력을 깎아 먹을 수 있다는 우려에서 비롯됐다. 첫 제정 이후 가격 제한을 강화하는 쪽으로 여러 차례 법 개정이 이뤄졌다. 〈그래픽 참조〉

책은 단순 상품이 아니라 공공재

이번에는 도정제에 대한 소비자들의 불만이 행동으로 이어져 관련법(출판문화산업 진흥법) 개정 가능성이 생겼다는 점에서 이전과 다르다. 도정제 폐지 국민청원이 지난해 말 20만 명을 넘겼고, 지난 2월에는 ‘작가A’가 도정제에 대한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했다. 특히 작가A는 재판비용을 텀블벅에서 펀딩해 목표한 4000만원 모금에 성공했다. 단순 클릭이 아니라 자기 돈을 지출하며 도정제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얘기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이런 움직임에 맞선 출판인들의 논리는 책은 단순 상품이 아니라는 것이다. 구입 비용보다 값진 시간과 노력을 들여 읽어야 비로소 소비가 완성된다. 1000개가 넘는 전국의 공공도서관 숫자가 책이 일종의 공공재라는 증거다. 그래서 출판산업에 대한 보호와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도정제법은 3년마다 타당성을 재검토하게 돼 있다. 11월 그 시한을 앞두고 도정제에 부정적인 일부 여론을 의식한 정부가 지난달 말 갑자기 입장을 바꿨다. 출판계는 정부가 현행 틀을 유지할 생각이 없다고 본다. 도정제를 완화하려 한다는 거다. 가격 할인폭이 커지거나 도정제 자체가 폐지된다면 자본력을 앞세운 온라인 서점이나 대형출판사에만 유리한 도정제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우려한다. 출판인회의를 포함해 30여 개 관련 단체가 도서정가제 사수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한국출판인회의의 박성경 유통정책위원장(도서출판 따비 대표)을 26일 전화 인터뷰했다.

출판인회의 박성경 유통정책위원장.

출판인회의 박성경 유통정책위원장.

정부가 도정제를 없앨 가능성도 있다고 보나.
“완전 폐지는 아닌 것 같다. 개악 가능성이 있다. 정부가 소비자 권익 보호를 이유로 여론을 좀 더 듣겠다며 현행 틀을 유지하는 기존 민관협의체의 합의안을 깼다. 그대로 못 하겠다고 한다. 그럼 어떤 방식으로 갈 거냐는 질의에는 답이 없다. 할인폭을 확대하는 방식을 고려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할인폭을 확대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나.
“현재 책 정가의 15%인 할인폭을 5% 늘려 20%로만 확대해도 우리 예상으로는 동네 서점이 최소한 수백 개, 많게는 1000개까지 문 닫을 수밖에 없다(※한국서점조합연합회에 따르면 2019년 전국의 서점 수는 2312개다) 서점인들은 현재 도정제가 산소호흡기라고 말한다. 5% 추가 할인 허용은 산소호흡기를 떼는 것이다. 출판사도 마찬가지다. 매출액에서 원가·판매비 등을 뺀 영업이익률이 대개 6% 안팎이다. 할인율 확대로 매출이 줄면 바로 적자전환이다. 특히 작은 출판사들은 타격이 클 수밖에 없다.”
그렇더라도 서점과 출판사의 생존을 위해 소비자들에게 책을 싸게 살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지난달 문화체육관광부의 여론 조사 결과 도정제 찬성이 30%대, 반대가 20%대였다. 도정제는 소비자의 권리를 제한하는 게 아니라 양보를 요청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출판사가 최소한의 안정성을 확보해야 다양한 책을 기획할 수 있다. 도정제가 완화되면 당장 팔리는 책, 비용을 줄인 가벼운 책을 만들 수밖에 없고 새로운 작가를 발굴하는 투자도 할 수 없다. 현행 도정제는 출판 다양성을 만들어냈다. 신간 종수가 늘었다. 팔고 싶은 책을 직접 고르는 큐레이션을 통해 서점 주의 취향을 드러내는 독립서점도 최근 부쩍 늘었다. 도정제는 이런 현상을 위한 기회비용이라고 할 수 있다.”

작은 서점·출판사 차별 시정돼야

하지만 현행 도정제는 큰 출판사, 큰 서점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다. 가령 인터넷 서점은 할인 한도를 모두 채워 15%를 깎아준다. 자금력이 달리는 지역서점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이는 고객 감소로 이어진다. 한편 작은 출판사, 작은 서점이 어려운 이유가 반드시 도정제 가격 할인 때문만은 아니다. 가령 대형 서점과 비교하면 작은 서점은 중간에 도매상이 끼어들어 결국 상대적으로 비싼 가격에 출판사로부터 책을 공급받을 가능성이 크다. 작은 출판사도 불이익을 받는다. 큰 출판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싼 가격에 대형 서점에 책을 공급하게 된다. 그래서 서점이나 출판사의 규모에 상관 없이 공급률을 통일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이런 차별도 해결되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지적하자 박 위원장은 “작은 서점에 책을 공급하는 도매상에 지금보다 책을 싸게 공급할 여력이 출판사에 별로 없다”고 답했다. 지금처럼 작은 서점은 당분간 대형 서점보다 책을 비싸게 공급받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도정제 문제와 함께 해결되어야 할 과제다.

지금 정가제가 출간 18개월이 지난 구간 할인 판매를 못 하도록 막다 보니 출판사들이 멀쩡한 책을 폐기하는 현상이 발생한다. 완전 도서정가제를 반대하는 생태계 모임 배재광 대표는 이런 폐기 물량이 많게는 전체의 30%에 이른다고 주장하는데.
“그건 좀 과장인 것 같다. 지금은 출판사들이 신중해졌다. 과거처럼 안 팔리면 파격적인 가격 할인을 해서라도 파는 길이 막혀서다. 안 팔려 남는 물량은 출판사가 리스크로 안고 갈 수밖에 없다.”

박 위원장은 “도정제 합의안을 문체부가 갑자기 깬 배경에는 청와대가 있다고 알려졌다”고 전했다. 출판계에는 노영민 비서실장이 일정한 역할을 했다는 얘기가 돈다. 이런 관측은 그럴듯한 개연성이 있다. 지난해 말 정부가 웹소설·웹툰에도 도정제를 일률 적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무료 보기 혜택 등이 사라질 것을 우려한 젊은 세대가 도정제 폐지 청와대 청원에 대거 가세했다고 얘기되기 때문이다. 청와대가 젊은 세대의 여론을 의식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박 위원장은 “요즘 전자책 시장은 도정제 없던 시절의 종이책 출판시장을 보는 것 같다”고 했다. 2000년대 초중반 메이저 온라인 서점이 온갖 마케팅 방법을 동원해 시장 점유율을 늘리자 결국 작은 서점들이 많이 사라진 것처럼, 전자책 시장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벌어져 앞으로 중소 플랫폼이 사라질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이다.

구미 삼일문고 김기중 대표 “도정제 때문에 서점 열기로 결심했는데…”

경북 구미의 삼일문고는 소문난 알짜 서점이다. 화제가 되는 신간이 나오면 저자 강연을 유치하는 전국구급이다. 구미역과 구미시청 사이 낙후된 구도심에 2017년 들어서 지역의 문화명소로 뿌리를 내리면서 서점 인근의 상권까지 부활시키고 있다는 평가다.

김기중 대표

김기중 대표

삼일문고 김기중(47·사진) 대표는 “현행 도정제를 완화하려는 정부의 움직임에 서점인들이 크게 반발하는 이유는 수익이 줄어들 거라고 예상하는 차원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도정제는 마지막 버팀목 같은 건데 이것마저 사라지면 가뜩이나 운영을 버거워하는 많은 서점들이 사라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김 대표는 “서점은 매출에서 원가를 뺀 마진율이 20% 정도밖에 되지 않아 인건비·임대료 등이 잘 해결이 안 되는 업종”이라고 했다. 그나마 삼일문고는 예외적인 경우다. 김 대표가 서점이 들어선 건물의 소유주이기 때문이다. 지하층과 1층 합쳐 200평 서점 공간에 대한 임대료가 나가지 않고 오히려 4층 건물의 2개 층에서 많지 않지만 임대수입이 들어온다.

김 대표는 이를 바탕으로 도정제법이 허용하는 최대 할인폭을 제공하는 인터넷 서점과 경쟁해보기 위해 직접 할인 5%, 적립 5% 합쳐 전체 책값의 10%를 깎아주는 가격 정책을 선택했다. 대개 지역 서점들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직접 할인은 못 해주고 책값의 5% 적립금을 쌓아주는 서점이 대부분이다. 삼일문고는 한 번에 6만원 이상 책을 구입한 고객에게는 이후 1년간 직접 할인 10%, 적립 5%, 합쳐 15%를 할인해준다. 이렇게 되면 인터넷 서점과 똑같은 할인폭이다. 김 대표는 이런 저가 정책 덕분에 단골이 늘어 요즘은 많지 않은 금액이지만 흑자를 낸다고 했다.

김 대표는 2014년 구미의 유일한 종합서점이었던 60년 전통의 춘양당 서점이 문을 닫자 자신이 서점을 경영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했다. 하지만 서점인들 이야기를 들어 보니 도저히 이익을 낼 수 없는 구조였다. 하지만 그해 말에 도정제가 강화돼 살인적인 할인 경쟁이 사라지자 사정이 달라졌다. 이 정도면 할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삼일문고는 도정제 덕분에 생긴 서점이다.

신준봉 전문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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