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겨만 달라" 6공 때도 했는데…실종된 '정치 풍자' 코미디

중앙일보

입력 2020.08.23 14:48

업데이트 2020.08.23 15:50

박영진=4대강 사업, 성공입니까, 실패입니까? 아, 실패다?
유민상=아니요, 아니.
박영진=아, 성공이다?
유민상=자, 원하는 거 얘기할게요.
박영진=자원하는 거? 자원? 자원외교? 알겠습니다. 유민상 씨가 원하는 대로 자원외교, 과연 미래를 위한 투자인가, 국민의 혈세 낭비인가를 놓고 난상토론을 시작하겠습니다.

팬덤 정치의 시대 "정부 비판 뉘앙스만 비쳐도 지지층 '좌표' 찍고 공격"

2015년 6월 14일 KBS '개그콘서트'의 '민상토론'의 일부다. 토론프로그램 포맷으로 시사 풍자를 시도했던 이 코너는 박근혜 정부에서 주요 이슈였던 4대강 사업 평가를 비롯해 무상급식, 자원외교, 성완종 리스트 파문 등을 다뤄 화제가 됐다. 대체로 여당 입장에선 난처한 소재가 많았다.

개그콘서트 '민상토론' [유튜브 캡쳐]

개그콘서트 '민상토론' [유튜브 캡쳐]

이명박 정부 후반부인 2011~2012년 KBS '개그콘서트'의 코너 '사마귀 유치원'도 당시 여당인 한나라당에선 곤혹스러워했던 코너다. “국회의원이 되려면 집권여당 수뇌부와 친해져서 집권여당의 공천을 받아 여당의 텃밭에서 출마하면 된다” “약점을 개처럼 물고 늘어지면 국회의원이 될 수 있다”는 발언을 내보낸 2011년 10월 2일 방송이 대표적이다. 여당 출신인 강용석 무소속 의원이 '국회의원을 모욕했다'며 개그맨 최효종을 고소했다가 취하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2012년 1월 9일 SBS 예능 토크 프로 '힐링 캠프, 기쁘지 아니한가'에 출연해 정치 재개 의사를 알렸던 문재인 당시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최효종씨가 아주 잘하던데요”라며 응원하기도 했다.

'개그콘서트'의 '사마귀 유치원' [유튜브 캡쳐]

'개그콘서트'의 '사마귀 유치원' [유튜브 캡쳐]

정치·사회 풍자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다. 1987년 민주화 운동을 통해 권위적인 ‘5공 시대’에 대한 청산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고(故) 김형곤의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 ‘탱자 가라사대’ 같은 풍자극이 나오는가 하면 최병서 등의 유명 정치인 성대모사가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지금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는 이러한 정치 풍자 코너를 찾아보기 어렵다. 왜 그럴까.

팬덤 정치의 시대, "분위기가 바뀌었다."
“지금 사회 분위기가 정치 풍자를 하려면 국민의 절반은 적으로 돌릴 각오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개그 콘서트'에서 '내 아를 낳아도!'라는 유행어로 많은 인기를 얻었던 개그맨 김시덕의 이야기다. 그는 21일 통화에서 “예전엔 정치인을 풍자하면 정치적 입장과 관계없이 모두 재미있어하며 박수를 쳤는데, 이제는 정치인을 풍자하면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그는 “한동안 개콘을 떠나있다가 지난해 복귀했더니 분위기가 너무 바뀌어 있었다. 예전엔 '그냥 웃겨만 달라'였는데 이제는 이거저거 스스로 조심해야 하는 것이 많아서 놀랐다”며 “'불편함'이 많은 시대가 되다보니 개그맨들도 위축될 수밖에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개그콘서트'에서 코미디40년 특집으로 방영한 '회장님, 회장님, 우리회장님'

'개그콘서트'에서 코미디40년 특집으로 방영한 '회장님, 회장님, 우리회장님'

익명을 요구한 한 개그맨은 “과거 김형곤·이주일 선배도 노태우·김영삼·김대중 등 주요 정치인을 개그 소재로 다루고 희화화했는데, 지금은 소위 '6공 시대(노태우 정부)'보다 정치 풍자를 못 하고 있으니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다”라며 “정부 비판으로 비쳐지는 뉘앙스만 발견돼도 지지층이 떼로 몰려다니며 소위 '좌표'를 찍고 개인 SNS를 털기 때문에 누구도 정치풍자를 하려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소위 '팬덤' 정치가 강화하고 이에 따라 정치인에 대한 극단적 지지세력이 등장하면서 풍자를 모욕으로 받아들인다는 이야기다. 개그우먼 김영희씨는 지난해 10월 팟캐스트 ‘육성사이다’에서 출연진들과 ‘금수저’를 주제로 농담을 주고받다가 “지금 어떤 느낌인지 아세요? 조국 딸 느낌 나요. 박탈감 느껴요”라고 말했다가 비난 여론에 밀려 결국 방송을 중단했다.

한 방송계 관계자는 “솔직히 부동산 실패와 고위공직자 다주택 보유, 조국 사태, 추미애 법무부 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의 갈등 등 코미디 프로그램이 풍자할 수 있는 소재가 적지 않다”면서도 “군사정권처럼 정부에서 지침이 내려오거나 압박을 주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걸 다뤘을 때 어떻게 될지 분위기를 아니까 아이디어조차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나마 소재 선택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유튜브에서는 정치 풍자 코미디가 간간이 이어지고 있다. '개그콘서트' 출신 개그맨 김영민은 지난 4월 '내시십분'이라는 채널을 만들어 정치 이슈를 다루는 중이다. '내시십분'은 과거 그가 '개그콘서트'의 '감수성'이란 코너에서 맡았던 내시 역할에서 따온 제목이다.
'내시십분'의 대표 코너 '김제동화'는 유명 동화를 통해 정치 세태를 풍자한다. 예를 들어 11일 '알라딘과 요술램프'에선 "‘지이니야 집값을 올리고 싶어’, 지이니는 새로운 부동산 정책을 만들어 집값을 올려줬지요”라며 현 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꼬집었다. 램프의 요정 '지이니'는 디즈니 만화 '알라딘'의 램프 요정 지니와 문재인 대통령을 가리키는 '이니'의 합성어다. 또 만화 '알라딘'의 OST 'A whole new world'를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로 해석해 부르기도 했다.

'내시십분'

'내시십분'

유튜브 '내시십분'의 주요 코너 [유튜브 캡쳐]

유튜브 '내시십분'의 주요 코너 [유튜브 캡쳐]

4월 개설한 '내시십분'은 7월 구독자 10만명을 돌파해 지금은 11만명이 됐다. 하지만 그의 유튜브 채널 댓글을 보면 항의나 비난도 만만치 않다. “마음고생이 너무 심해 후배들에겐 (정치풍자) 하지 말라고 만류한다”는 그에게 왜 정치 풍자를 다루고 있는지 물어봤다. 다음은 일문일답.

개그맨 김영민씨는 21일 "개그맨이 대통령을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어야 세상이 더 좋아진다"고 말했다. 김태호 기자

개그맨 김영민씨는 21일 "개그맨이 대통령을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어야 세상이 더 좋아진다"고 말했다. 김태호 기자

정치 풍자를 다루게 된 이유는?
코미디 자체가 시사를 다룰 때 가장 빛이 나지 않나. 대통령하고 '맞짱'뜨고 당당할 수 있는 직업은 코미디언뿐이라고 생각해왔다. 코미디는 현실을 담아 비틀어야 맛이 나는데 어느 순간 시사 코미디라는 것이 이 시대에서 사라지고 있더라. 그런데 때마침 유튜브라는 채널이 뜨기 시작해, '저기서 시사 코미디를 하면 어떨까' 생각했다.”
일각에선 박근혜 대통령이 '여의도 텔레토비'를 못마땅하게 여긴 뒤부터 시사 코미디가 사라졌다고 한다.
박근혜 대통령 때도 '개그콘서트'에는 정치풍자 코너가 있었다. '업계'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이거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 정치풍자를 놓고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지금은 갈등이 생길 일조차 없다. 시도조차 못 하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4년 '폭소클럽'을 통해 데뷔했는데 지금처럼 눈치를 보고 정치 풍자를 하기 힘든 적은 없었다.”
'개그콘서트'가 낮은 시청률로 고전하다가 종영됐다.
코미디를 간단히 설명하면 사회 현상이라는 재료를 담아내 웃기는 거다. 그런데 사회 현상을 담을 수 없으니 재료가 취약해진다. 예를 들어 과거 김형곤 선배가 한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은 권위적인 기득권의 모습을 '비룡그룹'이라는 틀 안에서 담아 히트를 쳤다. 지금 세상이 그때와 크게 바뀌었을까. 세상은 다르지 않은데 그것을 비꼬고 풍자하면 지지자들은 '좋아졌는데 왜 저러냐'고 화를 낸다. 현상을 숨길수록 코미디가 이를 풍자하고 다뤄야 한다. 그걸 못하니 외면받은 것이다.”
개그맨 김영민씨는 21일 "개그맨이 대통령을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어야 세상이 더 좋아진다"고 말했다. 김태호 기자

개그맨 김영민씨는 21일 "개그맨이 대통령을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어야 세상이 더 좋아진다"고 말했다. 김태호 기자

'내시십분'에 문재인 대통령 지지자들의 항의도 적잖다. 보수우파에 우호적이라는 비판도 있다.
원래 코미디는 진보 정권을 만나면 보수적, 보수 정권을 만나면 진보적이라고 양 지지층에게 원망을 듣는다. 요즘 내가 문재인 정부를 풍자하고 패러디하니까 매일매일 집단으로 찾아와 댓글을 쏟아낸다. '어디 감히 너 따위가…' '못 배운 딴따라 것들이…' '그러니까 개그맨들이…'로 시작해 비난하는 내용이다. 그러면서도 '내시십분' 채널에 매일매일 온다.”
감당하기 어려운 댓글이나 공격도 있나 
악성 댓글로 도배하는 건 기본이고, 메일·휴대전화·카카오톡 같은 것으로 계속 괴롭힌다. 심지어 과거와 관련된 허위사실을 뿌린다. 망신을 줘서 지치게 하는 거다. 유튜브는 '모욕죄'를 인정하지 않아 이런 댓글을 수사할 때 공조가 잘 안된다고 한다. 이런 점을 알고 저런다는 생각도 든다. 가끔 후배들이 이런 채널 만들고 싶다며 문의하면 그동안 받은 공격들 보여주면서 만류한다.
개그맨 김영민씨가 받은 카카오톡 항의 내용 중 일부

개그맨 김영민씨가 받은 카카오톡 항의 내용 중 일부

그렇게 힘든데 왜 하나
매스미디어가 발달한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개그맨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통령 욕을 한다.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조롱은 표현하기도 어려울 정도다. 현 정부에 대한 풍자와 조롱으로 전 세계가 빵빵 터지는데 왜 우리만 안 되나. 대한민국 법이 있다. 선을 넘으면 고소·고발로 알아서 잡으러 온다. 개그맨들이 자유롭게 대통령 풍자하면 세상이 더 좋아지면 좋아졌지 나빠질 일은 없지 않나. 오죽하면 나 같은 '못 뜬' 개그맨이 나서겠나.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Innovation La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