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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신’‘의지’ 뛰어넘어…새 세상 향한 출발 시도가 희망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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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호 22면

[미래 Big Questions] 역사의 미래

막스 베크만의 ‘출발’(1933~35). 단순히 나치 독일을 넘어 ‘의지’ 그 자체가 만들어 놓은 망각의 현실로부터의 출발을 의미할 수도 있다. [뉴욕 MoMA]

막스 베크만의 ‘출발’(1933~35). 단순히 나치 독일을 넘어 ‘의지’ 그 자체가 만들어 놓은 망각의 현실로부터의 출발을 의미할 수도 있다. [뉴욕 MoMA]

지방도시 예나(Jena)에서 첫 교수 자리를 얻은 독일 철학자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아직 비정규직이기에 월급은 못 받지만, 학생들을 대상으로 유료 강의는 할 수 있었다. 대표작 ‘정신현상학’을 여전히 출간하지 못해 경제적으로 고생하던 그에게 1806년 큰 시련이 닥친다.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예나를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 학생은 이미 피난 갔기에, 더는 돈 벌 방법이 없었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집주인 여인이 그의 아이까지 임신한 상태였으니, 근심 걱정으로 가득했을 그는 시내로 향한다. 화려한 군복을 입은 군인들 사이 백마를 탄 작은 사나이. 프랑스 혁명의 영웅, 동시에 혁명의 배신자. 왕정을 무너뜨린 공화정을 다시 무너뜨리고 황제가 된 나폴레옹. 인류의 발전과 만민의 해방이었을까? 아니면 본인의 야망과 프랑스 민족의 영광을 위해서였을까? 네덜란드,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 황제와 프랑스군은 전 유럽을 정복하는 듯했다.

이성·자유 중시하는 헤겔 철학 #개인의 불행·연민 따위는 무시 #헤겔의 관점 비판한 쇼펜하우어 #“역사는 목표 모르고 의지가 좌우” #쇼펜하우어 영향받은 거장 베크만 #작품 ‘출발’서 무지·폭력 탈출 강조

헤겔·마르크스 사상 19세기식 난센스

황제와 가난한 철학가의 만남. 헤겔은 추후 기억한다. 나폴레옹은 마치 말 탄 ‘세계정신’ 같았다고. 헤겔이 말한 ‘세계정신’이란 무엇일까? 모든 생명체는 육체와 정신을 가지고 있다. 정신은 생각하고 육체는 실천한다. 하지만 오로지 인간의 정신만이 자신이 사는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 이해란 언제나 자유다. 물질적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개인의 정신은 오랜 역사를 통해 ‘세계정신’으로 성장하고, 가끔 위대한 한 명의 존재와 행동을 통해 실천된다. 바로 나폴레옹 같은 위대한 인물 말이다.

위대한 한 명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만든다는 세계정신. 그렇다면 세계정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언제나 이성과 자유를 향한다고 헤겔은 주장한다. 전쟁과 잔인함으로 가득한 인류 역사가 언제나 이성과 자유로 향한다는 건 무슨 말일까? 어린 시절의 꿈, 사랑하는 연인들의 희망, 아이의 행복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하는 부모 … 헤겔식 정신에 이따위 개인적 목표는 중요하지 않다.

시련과 불행 모두 세계정신의 거대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전쟁과 학살을 통한 개인의 불행은 인류의 거대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피할 수 없는 절차이기에, 개인에 대한 연민과 배려를 모르는 세계정신은 시체와 해골로 가득한 언덕을 건너야만 한다고 헤겔은 주장한다. 더구나 세계정신은 KTX같이 직선으로만은 가지 않는다. 마치 두더지같이, 우리 눈에는 이해 불가능한 “역사적 땅굴”을 파며 여기저기 후비고 다니는 듯하지만, 세계정신은 필연적으로 역사적 목표와 사명을 달성할 것이라는 말이다. 참 오만하고 잔인한 철학이다. 보이지도, 만질 수도, 증명할 수도 없는 추상적 존재의 목표달성을 위해 개인의 불행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실은 언제나 부분이 아닌 전체에만 있고 전체의 목표가 개인의 행복보다 더 중요하다는 헤겔 철학을 응용한 마르크스는 비물질적 정신 대신 현실에서의 물질적 계급투쟁을 역사의 엔진으로 지정한다. 계급투쟁을 통한 역사의 목표가 실천되는 순간 인류는 지난 수천 년 동안의 시련과 고통을 드디어 이해하게 될 것이다. “두더지 동지, 그동안 땅굴 파느라 고생 많았소” 하며 말이다.

1806년 독일 예나에서 나폴레옹을 만난 헤겔. 잡지 하퍼 삽화(1895).

1806년 독일 예나에서 나폴레옹을 만난 헤겔. 잡지 하퍼 삽화(1895).

헤겔철학과 마르크스 사상 모두 인간과 우주를 잘 길든 증기기관으로 오해한 전형적인 19세기식 난센스다. 자연 과학적 필연과 확률적 우연의 결과물인 역사에 무슨 절대 목표가 있겠는가? 특히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1788~1860)에게 헤겔철학은 천박하기 짝이 없었다. 세상은 이성적이지도, 자유롭지도 않다. 역사는 목표를 모르고, 삶은 의미 없다. 우주에서의 모든 변화는 오로지 “의지와 표상” 덕분이라고 쇼펜하우어는 말이다. 번식하려는 의지, 살아남으려는 의지,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이려는 의지, 창조하려는 의지, 파괴하려는 의지.

의지는 잔인하고 이기적이다. 하지만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인간은 세상의 “물 자체”(Ding an sich)를 본질에서 인식할 수 없다고. “의지”를 칸트의 물 자체로 가설한 쇼펜하우어는 주장한다. ‘우리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세상은 물 자체인 의지의 왜곡된 표상일 뿐’이라고. 시간, 공간, 물질, 그리고 자아로 구성된 현실은 환상이라고. 예수님보다 500년 전 태어난 가우타마의 말이 맞았다고. 쇼펜하우어가 유럽에서 처음으로 불교사상을 철학적으로 소개하게 된 이유다.

쇼펜하우어 철학의 영향을 받은 화가 막스 베크만은 20세기 초 독일 미술계 최고 거장이었다. 그는 히틀러와 파시즘을 경험하며 이해한다. 파괴하려는 의지, 학살하려는 의지, 지배하려는 의지는 여전히 살아있었다고. 문명과 문화와 이성은 얄팍한 환상이었다고. 유대인이 아니면서도 스스로 고향 독일을 떠나 타향에서의 죽음을 선택한 막스 베크만의 걸작 ‘출발’. 어쩌면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인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누가, 어디로 출발한다는 걸까? 우선 당시 나치 독일의 실체를 보여주는 듯한 좌우 그림의 잔인함을 등지고 망명을 택할 본인의 미래를 보여주는 듯하다. 하지만 그게 정말 다일까? 베크만의 ‘출발’은 어쩌면 단순히 나치 독일을 넘어 ‘의지’ 그 자체가 만들어 놓은 망각의 현실로부터의 출발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겠다.

138억년전 탄생한 우주가 존재하는 이유는

거꾸로 묶인 오른쪽 패널에서의 남자. 어깨 큰 칼자국을 가진 그는 요란한 음악과 함께 무대 위에서 죽어간다. 세상은 유치한 연극이지만, 아무도 웃는 이가 없다. 왼쪽 패널은 더 잔인하다. 손발 다 잘려 기둥에 묶인 이들과 바닥에 버려진 여인. 그들을 향해 내리치는 도끼에서 물고기 한 마리가 쳐다본다. 베크만에게 물고기는 어쩌면 쇼펜하우어식 의지인지도 모르겠다. 욕구와 욕망으로 가득한 의지, 연민과 배려를 모르는 의지, 전체의 목표를 위해 개인의 행복을 짓밟는 의지. 그렇다면 희망은 없는 걸까? 의지의 잔인한 요구를 모두 거부하는 순간 우리는 새로운 세상으로 출발할 수 있다고 가운데 패널은 말하는 듯하다. 물고기를 풀어주는 순간 드디어 자신의 삶에서 왕이 될 수 있듯 말이다.

수천억 개의 태양계를 가진 수천억 개의 은하계들로 가득한 우주. 138억년 전 빅뱅과 함께 탄생한 우주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헤겔과 마르크스의 주장대로 세상은 원칙적 목표를 가지고 탄생했기에 개개인은 목표달성을 위한 하찮은 도구에 불과할까? 아니면 보고, 만지고, 천체망원경으로 관찰 가능한 우주는 영원히 이해 불가능한 물 자체의 표상과 시뮬레이션이기에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희망은 삶과 우주에 대한 질문 그 자체가 사실 아무 의미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걸까?

하지만 인식 그 자체만으로는 부족할 수도 있다. 프랑스 혁명을 상징하는 프리기아 모자를 쓴 ‘출발’ 중간 패널에서의 여인은 이미 아이를 안고 있다.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와 나폴레옹의 황제 계승을 보며 사람들은 말하지 않았던가.  혁명이 자신의 자식을 잡아먹는다고. 인류를 구원해주겠다던 혁명은 언제나 또다시 자신의 아이를 잡아먹고, 과거의 의지를 풀어준 우리 옆에는 아직 얼굴을 알 수 없는 두려운 미래의 의지가 거대한 물고기를 들고 우리를 유혹하고 있다.

정신, 의지, 또는 진화. 우리를 폭력과 무지에 가두어 두려는 유혹들은 영원하기에, 출발 그 자체가 아닌, 사실 불가능한 출발을 끝없이 시도하는 것이 호모 사피엔스의 유일한 희망인지도 모르겠다.

김대식 KAIST 교수·뇌과학자 daeshik@kaist.ac.kr
독일 막스-플랑크 뇌과학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땄다. 미국 MIT와 일본 이화학연구소에서 각각 박사후 과정과 연구원을 거쳤다. 미국 미네소타대 조교수, 보스턴대 부교수를 지냈다. 2013~2015년 중앙SUNDAY에 ‘김대식의 Big Questions’를 연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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