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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데 왠지 슬픈 페이소스…복고에 트렌드 쓸어담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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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싹쓰리’ 신드롬

유재석과 가수 비, 이효리가 뭉쳐 올 여름 가요계를 강타한 혼성댄스그룹 ‘싹쓰리’. [중앙포토]

유재석과 가수 비, 이효리가 뭉쳐 올 여름 가요계를 강타한 혼성댄스그룹 ‘싹쓰리’. [중앙포토]

MBC 예능프로그램 ‘놀면 뭐하니?’에서 1990년대 혼성 댄스그룹을 오마주하겠다며 만든 프로젝트 그룹 ‘싹쓰리’가 15일 방송을 끝으로 퇴장한다.

‘문화권력’ 40대 위한 90년대 추억 #반전 ‘부캐’들 친근한 노래로 구현 #일하는 스타·가수 육성 과정에 공감 #‘우리 기쁜 젊은 날’ 떠올리며 여운 #한때 시장 ‘최상위 포식자’ 시선도

‘싹쓰리’는 ‘유산슬’ ‘유고스타’ ‘유르페우스’ 등의 ‘부캐(제 2의 캐릭터)’를 앞세워 다양한 음악 장르에 도전해온 유재석이 가수 이효리와 비까지 ‘부캐의 세계’로 끌어들여 만든 ‘신인그룹’이다. 프로그램은 ‘싹쓰리’의 탄생 과정을 두 달간 낱낱이 소개했고, “올여름 음악 시장을 싹 쓸어버리겠다”는 그들의 포부는 그대로 실현됐다. ‘다시 여기 바닷가’는 Mnet ‘엠카운트다운’과 MBC ‘쇼! 음악중심’ 등 음악방송 2관왕과 각종 음원 차트를 석권했다. 커버곡 ‘여름 안에서’와 후속곡 ‘그 여름을 틀어줘’, 각자의 솔로곡 ‘LINDA’‘신난다’‘두리쥬와’ 역시 모조리 차트 상위권에 올랐다.

이에 대해 시장 생태계를 교란하는 ‘최상위 포식자’라는 시선도 있었다. 두 달에 걸쳐 지상파 방송에 독점 홍보를 한 셈이니 출발선이 다르다는 지적이었다. 하지만 음원 및 활동 수입 전액을 불우이웃돕기에 기부한다는 계획을 밝히며 논란은 사그라들었다. 애초에 ‘공정한 데뷔’와는 차원이 다른 ‘이벤트’였던 것이다. 온라인 팬미팅에서 비가 이 프로젝트를 ‘놀이’라고 표현했듯, 어차피 허구이니 음악적 성취도 필요 없었다. 유재석의 아마추어 느낌 물씬한 퍼포먼스도, 혼성 댄스그룹의 시그니처인 속 시원히 질러주는 고음 파트의 부재도 아무 결함이 되지 않았다.

‘싹쓰리’는 90년대 댄스곡을 오마주한 노래들로 카세트테이프까지 발매했다. [중앙포토]

‘싹쓰리’는 90년대 댄스곡을 오마주한 노래들로 카세트테이프까지 발매했다. [중앙포토]

‘싹쓰리’ 돌풍은 어디서부터 불어온 걸까. 우선 TV 시청자들의 복고감성을 저격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스터트롯’에서 비롯된 트로트 열풍과 같은 맥락이다. 한물간 콘텐트로 밀려났던 대중가요 장르를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반복노출시키며 부활을 기획한 것이다. 상반기 중장년 세대의 배설욕을 해소한 ‘뉴트로’ 기획상품이 트로트였다면, 여름 시즌엔 ‘싹쓰리’의 혼성 댄스곡이 그 역할을 한 셈이다.

이효리 작사·이상순 작곡의 타이틀곡 ‘다시 여기 바닷가’는 90년대 ‘길보드 차트’의 흥행 공식을 그대로 적용했다. 저절로 리듬을 타게 되는 130bpm의 ‘당가다당’ 비트, 기승전결 내러티브형 가사와 쉬운 랩, 댄스 브레이크, 스토리텔링 뮤비까지 늘 보던 것처럼 친근하다. 뜻 모를 가사와 속사포 랩, 고난도 안무로 무장하고 해외에서 더 잘나가는 요즘 글로벌 아이돌은 국내에서 영접하기도 어려워진 지금, ‘친근한 대중가요’에 대한 욕구를 옛날 곡이 아닌 최신곡으로 채워준 것이다.

이런 복고 열풍은 TV라는 매체가 중년에게 지배당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젊은 세대가 유튜브 등 1인 미디어로 쏠리면서 TV는 중년 이상이 차지하게 됐고, 90년대에 청년기를 보내고 이제 문화권력이 된 40대가 TV 콘텐트를 제작부터 수용까지 장악한 것이다. 청춘의 전유물인 줄 알았던 멜로 드라마조차 이제 40대의 연애를 그리게 됐다. 이영미 대중문화평론가는 “50대가 정치적으로 기가 세다면 서태지 세대인 40대는 문화적으로 기가 세다. 청년 시절에 문화적으로 강세였던 세대일수록 40대에 접어들며 복고를 찾는 경향은 원래 있었다”면서 “90년대 강한 동질적 경험을 했던 세대들이 40대가 되면서 영화 ‘건축학 개론’(2012) 같은 ‘90년대 붐’이 시작됐고, ‘응답하라’ 시리즈도 당시 창작진이 마흔 즈음이었다. 그 끄트머리에 ‘싹쓰리’가 온 셈”이라고 분석했다.

‘싹쓰리’는 ‘90년대 붐’의 끝자락

지난달 30일 Mnet ‘엠카운트다운’ 1위를 차지했다. [중앙포토]

지난달 30일 Mnet ‘엠카운트다운’ 1위를 차지했다. [중앙포토]

‘싹쓰리’판 뉴트로의 차별점은 요즘 트렌드를 몽땅 쓸어 담아 재활용했다는 데 있다. 유재석의 전매 특허였던 ‘부캐’의 세계부터 확장시켰다. ‘부캐’와 ‘본캐(본 캐릭터)’라는 신조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일상생활 속의 자신과 온라인 공간에서의 캐릭터를 분리하는 요즘 사람들의 ‘멀티 페르소나’ 트렌드의 재해석이다.

SNS상에서 여러 계정을 사용하며 계정마다 다른 면모를 드러내는 행태를 패러디해 ‘1인 무한도전’을 계속해 오던 유재석이 이효리와 비를 끌어들였고, 이들이 ‘롤플레이’에 적극 가담하며 재미를 더했다. 여성 연예인의 이미지가 상업적으로 소비되는 것에 반감을 드러내며 미니멀리즘을 표방해온 이효리는 ‘린다G’로서 짙은 화장을 하고 화보를 찍었고, ‘화려한 조명’만 고집하던 월드스타 비도 ‘미워할 수 없는’ 밉상 ‘비룡’으로 이미지 반전에 성공했다. ‘부캐’라는 가면이 당대 최고 스타로서 다져온 이미지를 훼손하지 않고 적당히 본색을 드러내며 자유로울 수 있는 가상현실의 장을 제공한 셈이다.

유튜브를 활용한 쌍방향 소통도 키워드였다. 그룹 결성 초기 유튜브에 라이브 방송으로 채팅창을 열어 셋의 부캐명과 그룹명까지 온전히 댓글로 결정했다. 이런 소통은 신인가수 연습생 같은 ‘유두래곤’의 존재와 맞물려 양육형 팬덤으로 이어졌다. 유재석이 톱가수들의 스웨그에 주눅 들어 하면서도 특유의 무한도전 정신으로 ‘한땀한땀’ 이뤄가는 과정을 지켜본 팬들은 실제 결과물이 궁금할 수밖에 없었고, 묘한 성취감까지 덩달아 느낄 수 있었다.

관찰예능 특유의 생생한 리얼리티도 관음증을 자극했다. 통상 시청자들이 알 수 없는 프로듀싱 과정을 여과 없이 노출하며 화려한 스타가 아니라 일하는 프로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녹음실에서 전문용어를 쏟아내는 백전노장의 면모는 ‘리스펙트’할 만했고. ‘간지나는’ 뮤비 이면에서 땀 흘리며 수고하는 소탈한 쌩얼은 다 같이 나이 먹어가고 있다는 유대감도 제공했다.

90년대풍 앨범 재킷. [중앙포토]

90년대풍 앨범 재킷. [중앙포토]

‘챌린지’와 ‘굿즈’ 트렌드에도 올라탔다. 애초에 따라 하기 쉬운 안무를 짰고, 멤버들이 몸소 ‘챌린지’를 시작하며 참여를 유도했다. 여름 한 철 장사하고 미련 없이 물러가겠다고 스스로 ‘한정판’을 선언한 만큼, 굿즈도 ‘소장각’이 됐다. 11번가에서만 파는 싹쓰리 앨범과 굿즈는 1차 배송 주문이 조기 마감됐고, 콜라보 굿즈도 완판 행진 중이다. ‘싹쓰리 도넛’을 카세트테이프 패키지에 담아 파는 던킨도너츠는 “기존 콜라보 굿즈 대비 150% 높은 판매량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싹쓰리(SSAK3)’ 모티브를 담은 SPA브랜드 스파오의 반팔 티셔츠 7개 품목은 10분 만에 동났다. ‘펭수’ 등 다양한 콜라보 굿즈를 판매했던 스파오는 “가장 빠른 속도로 많은 품목의 아이템이 품절됐다”고 전했다.

사실 ‘한정판 아이돌’이라는 컨셉트 자체가 경쟁력이었다. 듀스의 ‘여름 안에서’를 리메이크하고 뮤비 촬영 과정까지 공개한 것부터 의미심장하다. 90년대 최고 인기를 구가하던 김성재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듀스가 영원히 ‘젊은 날의 상징’으로 박제됐듯, 싹쓰리도 한순간의 수명을 다하고 각자의 ‘본캐’로 돌아갈 것이기에 소중하다는 컨셉트인 것이다.

그래서 이건 궁극의 판타지다. 어느새 40대가 된 왕년의 스타들이 방부제 비주얼로 튀어나와 딱 그때 그 시절에 들었던 듯한 노래를 부르며 모두의 ‘리즈 시절’을 소환하지만, 설레던 그 시절은 흘러간 지 오래고 환상 속에나 있을 뿐이다. 뮤비 속 한가로운 바닷가를 독점한 ‘싹쓰리’ 멤버들과 달리, 거울에 비친 우리의 현실은 무더운 마스크를 굳건히 쓴 채 최악의 물바다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40대들은 유독 “슬프다” 반응 보여

어쩌면 이런 아이러니가 불러오는 페이소스가 ‘결정적 한 방’ 아니었을까. 마냥 경쾌하게 작곡된 ‘다시 여기 바닷가’에 40대들은 유독 “슬프다”는 반응을 보였다. “즐거운데 슬프다”“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는 댓글도 흔했다. 조지선 연세대 객원교수(심리학 전공)는 “나와 아무 상관 없는 BTS와 달리 ‘싹쓰리’는 중년들에게 젊은 시절의 추억을 소환하는 트리거로서 자신을 투영하게 만들었다”며 “젊은 시절을 회상할 때 양가적 감정이 들게 마련이다. 찬란하지만 불안했고, 반갑지만 왠지 후회되고, 그립지만 돌아갈 수 없다는 모호한 감정을 슬프다고 표현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사실 이런 ‘슬픔’조차 방송을 통해 조율된 감수성일 수도 있다. 뮤비 촬영을 위해 바닷가를 뛰어다니며 “너무 슬프다”“왜 이렇게 눈물이 나냐”던 이효리, “이 순간도 10년 뒤 좋은 추억이 될 것”이라 거듭 되뇌던 비를 보며 시청자들도 슬픔과 짠함을 전달받은 것이다.

이영미 평론가는 “이렇게 신나는 노래를 부르던 좋았던 시절이 우리에게 있었고, 더 이상 돌아오지 않을 것이며, 아직은 젊은 척하고 있지만 사실은 젊다고 우길 수 없다는 걸 다 알고 있다”며 “40대는 막 늙었다는 사실에 자기연민을 느끼겠지만, 이미 나이를 많이 먹은 트로트 세대가 부활한 트로트를 들으며 슬픔을 느끼지 않듯, 더 나이를 먹으면 오히려 슬프지 않을 것”이라고 위로했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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