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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해도 꿈은 부자” 레슬링 영웅, 남 돕기도 챔피언이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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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8호 24면

[스포츠 다큐 - 죽은 철인의 사회] 1984 LA 올림픽 금, 김원기

김원기 선수가 LA 올림픽 레슬링 그레코로만형 62㎏급 조 1위 결정전에서 스위스의 위고 디체를 공격하고 있다. 김원기는 1분56초 만에 폴승을 거뒀다. [중앙포토]

김원기 선수가 LA 올림픽 레슬링 그레코로만형 62㎏급 조 1위 결정전에서 스위스의 위고 디체를 공격하고 있다. 김원기는 1분56초 만에 폴승을 거뒀다. [중앙포토]

“비전도 없고 못생기고, 아버지가 중2 때 돌아가셔서 정말 가난했던 농촌 소년이 대한민국 건국 두 번째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됐어요. 기계공고 가고 싶었는데 가난 때문에 농고에 갔고, 1학년 때 ‘레슬링하면 대학 갈 수 있다’는 얘기에 레슬링부에 들어갔지만 가장 운동 못하고 체력 떨어지는 사람이 저였어요. 그런 저에게 LA 올림픽 막차 티켓이 주어졌고, 금메달을 목에 걸고 국방부에서 내준 헬기 타고 금의환향했지요. 그런 영광을 하늘이 줬으니 살아있는 이 순간이 너무나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함평농고 1학년 때 늦깎이 입문 #부상 딛고 LA 올림픽 한국 첫 금 #보험업·사업·강사 등 이력 다양 #부모 없는 아이 9명 양자로 돌봐 #함평레슬링협회장 맡아 후배 양성 #2017년 치악산 등반 중 심장마비사

“저는 자식이 없지만 부모 없는 아이 9명의 부모 역할을 하고 있어요. 얼마 전 결혼한 큰아이가 딸을 낳아 백일잔치했지요. 시험관아기 시술을 아홉 번이나 한 아내에게 너무너무 미안합니다. 지금은 아내에게 정말 최선을 다해 윗분으로 생각하고 모십니다. 저는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이 모인 꿈메달재단의 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매달 한두 번 장애인 시설, 보육원·소년원 등을 찾아 공연·스포츠재활 등 봉사활동을 하고 있지요. 어르신들을 위한 짜장면 봉사도 계속합니다. 함평군 레슬링협회장도 맡고 있는데요. 올림픽 금 2개를 배출한 함평에서 앞으로도 올림픽 챔피언이 나올 수 있도록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습니다.”

네팔 휴먼스쿨 짓는 데도 앞장

2016년 7월 13일 김원기 대표가 인터뷰에서 한 얘기들이다. 그와는 한국스포츠문화재단 이사로 함께 일하며 인연을 맺었다. 당시 인터뷰는 기사로 나가지 못했다. 언젠가 쓸 거라고 아껴놓고 있었는데 1년 뒤인 2017년 7월 27일, 비보를 접했다. ‘레슬링 올림픽 챔피언 김원기, 치악산 등산 도중 심장마비로 급사.’ 믿기지 않았다. 누구보다 건강하고, 밝고 활기차게 사는 분이었기 때문이다.

전남 함평농고(현 함평골프고) 출신인 김원기는 1984년 LA 올림픽 레슬링 그레코로만형 62kg급에서 금메달을 땄다. 대회 6일 전 당한 발목 부상을 딛고 결승에 오른 김원기는 요한손 켄톨레(스웨덴)와 3-3으로 비겼으나 ‘큰 기술 우선’ 룰에 따라 극적으로 승리를 거둔다. 양정모(1976년 몬트리올·레슬링 자유형)에 이어 대한민국 올림픽 사상 두 번째 금메달이자 LA 올림픽 한국 선수단의 첫 금이었다.

대한민국 올림픽 1호 금메달 주인공 양정모(오른쪽)가 김원기의 금메달을 만져보며 즐거워하고 있다. [중앙포토]

대한민국 올림픽 1호 금메달 주인공 양정모(오른쪽)가 김원기의 금메달을 만져보며 즐거워하고 있다. [중앙포토]

88 서울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서 후배이자 라이벌인 안대현에게 패한 김원기는 스물여섯 한창때 미련 없이 은퇴했다. 삼성생명에서 17년간 보험 영업 및 교육 업무를 맡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지만 보증을 잘못 서 빚더미에 올라앉기도 했다. 명예퇴직금으로 빚을 청산한 뒤 지자체에 자재를 납품하는 사업체를 운영했다. 특강 강사로도 이름을 날린 그는 특유의 익살스런 표정과 말솜씨로 “나는 나를 넘어섰다. 가난했지만 꿈은 가난하지 않았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주경야독으로 경희대에서 체육학 박사학위도 받았다.

고 김원기 대표의 부인 문은경 여사(오른쪽)와 산악인 엄홍길씨(왼쪽에서 두번째), 유도 금메달리스트 하형주 교수가 함평레슬링기념관에서 고인의 사진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오종찬 객원기자

고 김원기 대표의 부인 문은경 여사(오른쪽)와 산악인 엄홍길씨(왼쪽에서 두번째), 유도 금메달리스트 하형주 교수가 함평레슬링기념관에서 고인의 사진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오종찬 객원기자

지난 7월 27일, 함평 학다리고에 있는 김원기레슬링체육관에서 고인의 3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함평은 대한민국 레슬링의 메카다. 김원기에 이어 88 서울 올림픽에서 김영남(금), 노경선(동)이 메달을 땄고, 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도 김종신이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후 함평 레슬링은 오랜 침체기를 겪었고, 김원기 회장은 시간 날 때마다 고향에 내려와 후배를 가르치고 이들이 좋은 환경에서 운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애썼다. 그 노력의 결과로 함평중-학다리고-함평군청으로 이어지는 엘리트 레슬링부가 만들어졌고, 김원기레슬링체육관도 최근 개관했다.

이날 행사에는 산악인 엄홍길 대장, LA 올림픽 유도 금메달리스트인 하형주 동아대 교수, 복싱 경량급의 전설 장정구 챔프 등 낯익은 인물들이 참석했다. 고인의 친구인 하형주 교수는 “당시 원기는 메달 후보에도 들지 않았을 정도로 무명이었어요. 원기가 불굴의 투혼을 발휘해 첫 금을 따면서 선수단에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퍼졌죠. 제가 세 번째 금메달을 땄는데 원기가 길을 열지 않았으면 제 금메달도 없었을 겁니다”고 말했다.

엄홍길 대장도 ‘내 동생 원기’를 추모했다. “2010년 엄홍길휴먼재단이 네팔 팡보체(4060m)에 1호 휴먼스쿨을 지을 때 원기 부부가 팡보체까지 와서 힘을 실어줬어요. 네팔 아이들한테 먼저 다가가고 스스럼없이 어울리던 동생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부인 문은경 여사에게 남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물었다. “참 선한 사람이었어요. 남에게 먼저 나누고 베풀 줄 아는 성품이었죠. ‘이 사람하고 살면 다른 사람한테 욕은 먹지 않겠구나’ 싶었어요”라며 희미하게 웃었다.

내가 옆에서 지켜본 김원기는 너무나 착하고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융통성이 좀 부족하고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속으로 삭히는 성격이었다. 문 여사는 “그이가 받는 스트레스는 대부분 다른 사람 고충이나 민원 들어주는 데서 온 거였어요.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부탁을 받고 다른 분에게 또다시 부탁해야 하니 스트레스에 상처도 받았지요. 옆에서 보기 안타까워서 ‘그냥 모른 체하면 안 되냐’고 해도 끝까지 하려다 보니 본인의 삶이 너무 힘들었던 거죠”라고 말했다.

경험 없이 뛰어든 사업을 하면서 겪은 어려움, 남 도와주기 위해 백방으로 뛰다가 받은 스트레스가 ‘레슬링 올림픽 챔피언’의 심장까지 정지시킬 정도였을까. 문 여사에게 사고 당시 상황을 들었다.

“원주 치악산 근처 지인의 집에서 아침을 간단히 먹고 등산을 시작했어요. 정상 직전 쉼터에서 물과 간식을 먹고 출발했는데 갑자기 ‘어지럽다’며 쓰러졌어요. 등산하던 분들이 몰려와 심폐소생술을 했고, 저는 119에 신고를 했는데 구조 헬기 두 대가 모두 수리 중이라는 겁니다. 남양주에서 헬기가 도착하기까지 1시간 정도 걸렸는데 그때 골든 타임을 놓친 거죠. 남편을 헬기에 실어 보내고 저는 걸어 내려와 병원에 도착했는데, 영안실로 안내하는 겁니다.”

헬기 늦게 도착, 골든 타임 놓쳐

전조(前兆)가 전혀 없었기에 더욱 받아들이기 힘든 죽음이었다. 사고 열흘 전에 1박2일 일정으로 건강검진을 했는데 고지혈증이 좀 있다고 해서 약을 받아온 것밖에 없었다고 한다.

문 여사에게 ‘김원기 정신’이 뭐냐고 묻자 “섬김과 나눔”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한 살만 많아도 형님으로 깍듯이 모시고, 나이 어린 후배에게도 함부로 하지 않았어요. 한국 레슬링의 침체가 길어지고 함평에서 좋은 선수가 나오지 않는 걸 늘 안타까워했지요. 남편의 뜻이 열매를 맺어서 좋은 체육관과 팀이 만들어졌으니 김원기를 뛰어넘는 후배가 나오고, 레슬링이 생활 스포츠로도 더욱 활성화되면 좋겠어요.”

효자종목 레슬링, 기업 지원 끊기고 올림픽 퇴출 소동에 쇠락

레슬링은 올림픽 효자 종목이었다. 건국 후 1호(양정모), 2호(김원기) 금메달이 레슬링에서 나왔다. 한국은 올림픽 레슬링에서 모두 11개의 금메달을 땄고, 은 11개, 동 13개를 보태 총 35개의 메달을 수확했다. 그레코로만형(상반신만 공격할 수 있는 종목) 스타 심권호는 1996 애틀랜타에서 48kg급 우승을 차지한 뒤 2000 시드니에서는 54kg에서도 금메달을 따냈다. 그러나 한국 레슬링은 2016 리우에서 동 1개의 초라한 성적을 냈고, 지금도 세계 정상권 선수가 잘 보이지 않는다. 대한레슬링협회는 1983년부터 삼성그룹의 지원을 받으며 쾌주했으나 2011년 삼성이 손을 떼면서 재정 압박에 시달렸다. 또 레슬링이 2013년 IOC(국제올림픽위원회)로부터 퇴출 명령을 받았다가 가까스로 살아남는 과정에서 스포츠 유망주들이 레슬링을 기피하게 됐다. 안한봉 전 대표팀 감독이 개발한 ‘사점(死點) 훈련’(죽음 직전까지 몰아붙이는 방식)으로 대표되는, 스파르타식 훈련을 받아낼 만한 선수도 많지 않다.

레슬링이 효자 종목의 위상을 회복하려면 모두가 즐기는 생활 스포츠로 자리잡고 그 속에서 유망주를 발굴하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하형주 동아대 교수는 “인체에는 206개의 뼈와 약 700개의 근육이 있다. 이 뼈와 근육을 하나도 빠짐없이 사용하는 종목이 레슬링이다. 선진국에서는 레슬링을 정규 교과목으로 편성해 체력과 정신력을 키워준다”고 말했다.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 / 중앙콘텐트랩 jerr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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