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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니츨러·프로이트…지식인 융합 모임, 비엔나 이끌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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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8호 18면

바우하우스 이야기 〈41〉

“언제쯤 당신은 깨닫게 될까요, 비엔나가 당신을 기다린다는 것을(When will you realize, Vienna waits for you).”

의사·미술가·음악가들 난상토론 #다른 도시에 없는 학제간 교류 #기존 이성적 질서에의 저항이 #바우하우스 ‘예술과 기술 통일’로

꽤 오래전 유행했던 빌리 조엘의 노래다. 스트레스로 한숨만 팍팍 나올 때면, 나는 오스트리아 빈의 오래된 기억들을 떠올리는 이 노래를 일부러 찾아 듣는다. 유럽의 많은 도시를 가봤지만, 내겐 빈이 가장 마음 편하다. 선조들의 유산으로 먹고사는 로마나 파리 같은 거만함이 없다. 뻑뻑한 느낌의 베를린이나 프라하 같은 도시들에 비하면 빈은 아주 나긋나긋하다. 정치사회적 긴장이 빠져있는 빈 특유의 미학 때문이다.

오스트리아의 기원은 신성로마제국이다. 이탈리아, 스페인으로부터 네덜란드, 헝가리, 보헤미아에 펼쳐진 합스부르크 왕가의 신성로마제국은 13세기 말부터 수세기 동안 유럽에서 가장 큰 영토를 가진 나라였다. 1804년 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위하며 프랑스제국을 선언하자, 이에 대항해 합스부르크 왕가는 신성로마제국의 세습영지들을 규합해 ‘오스트리아제국’을 선포한다. 그러나 나폴레옹과의 전쟁부터 기울기 시작한 오스트리아제국의 국운은 프로이센과와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급속히 쇠약해졌다.

살롱·카페 하우스마다 어울린 흔적

1 현대음악가 아놀드 쇤베르크. 2 소설가 아르투어 슈니츨러. 3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 4 오스트리아 빈을 에워싼 순환도로 링 슈트라세. 그래픽=이은영 lee.eunyoung4@joins.com

1 현대음악가 아놀드 쇤베르크. 2 소설가 아르투어 슈니츨러. 3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 4 오스트리아 빈을 에워싼 순환도로 링 슈트라세. 그래픽=이은영 lee.eunyoung4@joins.com

당시 비스마르크의 프로이센은 게르만 민족들만의 ‘작은 독일’ 통일을 주장했고, 오스트리아는 신성로마제국 영토의 다양한 민족들을 포함하는 ‘큰 독일’ 통일을 주장했다. 내용은 통일의 주도권 다툼이었다. 결국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이 일어나고, 오스트리아는 불과 두 달을 못 버티고 패한다. 프로이센은 이어 프랑스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했다. 오스트리아를 왕따시킨 게르만 민족의 통일 독일제국이 1871년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선포되었다.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하자, 오스트리아제국에 속해있던 민족들은 앞다투어 독립을 시도했다. 오스트리아는 그중 인구비율이 가장 높은 헝가리인과 가까스로 협상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라는 희한한 이중 제국을 세운다. 1867년의 일이다.

이때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때까지의 50여 년을 사람들은 ‘벨 에포크(Belle Époque)’, 즉 ‘좋은 시절’이라고 부른다. 유럽 대륙에 상당히 오랜 기간 전쟁이 없고, 각 나라에 경제적 부흥이 일어났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같은 시기를 ‘팽 드 시에클(fin de siècle)’이라 부르기도 한다. ‘세기말’을 뜻하는데, ‘퇴폐’ 또는 ‘쇠락’을 의미하는 ‘데카당스’의 암울한 시기라는 것이다.

‘벨 에포크’나 ‘팽 드 시에클’은 프랑스 말이다. 하지만 당시 유럽 전체의 상황을 표현하는 개념이 된다. 특히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라는 ‘이중 제국’의 수도 빈은 ‘좋은 시절’과 ‘세기말’이 혼재된 ‘이중 운명’이었다. 근대 부르주아 자유주의와 황제 제국의 이 어색한 공존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이 시기 잉태된 ‘빈 모더니즘’이라 불리는 독특한 문화적 실험들은 오늘날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난 호에서 설명한 경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종류의 편집방식, 즉 ‘종합예술’이 바로 그것이다.

19세기 말, 빈에는 다른 유럽의 대도시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지식공동체’가 존재했다. 의학·미술·건축·음악·디자인·철학의 경계를 뛰어넘는 지식인들의 모임이다. 무슨 일이든 일단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야 ‘창조적 편집’이 가능해진다. 그 나물에 그 밥만 매일 반복되면 그 어떤 혁신도 일어나지 않는다.

링슈트라세를 건설한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

링슈트라세를 건설한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

빈에서 활동하던 지식인들은 수시로 뒤엉켜 토론을 벌였다. 예를 들어, 12음 기법의 무조음악으로 현대음악의 혁명을 일으킨 음악가 아놀드 쇤베르크는 스스로 화가를 자처했다. 칸딘스키를 비롯한 청기사파 회원들과 뮌헨과 빈을 오가며 수시로 어울렸다. 청기사파 전시회에 자기 그림을 출품하기도 했다. 건축가 아돌프 로스는 쇤베르크의 절대적 추종자였다.

쇤베르크는 오스트리아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젊은 화가 리하르트 게르스틀에게서 그림을 배웠다. 둘은 함께 존경하던 구스타프 말러와도 자주 어울렸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게르스틀이 쇤베르크의 아내 마틸데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결국 둘이 사랑을 나누는 현장을 쇤베르크가 목격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쇤베르크는 자녀들을 생각해서 가족으로 돌아오라고 간곡하게 마틸데를 설득했다(말러도 그로피우스와 바람난 아내 알마에게 가정으로 돌아오라고 간절히 설득했다. 참 흥미로운 빈의 부부관계다). 마틸데가 쇤베르크에게 돌아가자 게르스틀은 자신의 그림들을 불태우고 거울 앞에서 목을 맨다(게르스틀의 남은 그림 대부분은 빈의 레오폴드 뮤지엄에 전시되어 있다. 클림트나 쉴레의 그림과는 또 다른 차원의 충격을 준다).

당시 빈의 과학자·화가·의사·언론인들은 살롱과 카페하우스에서 수시로 만났다. 지금도 카페 첸트랄이나 카페 란트란 같은 빈의 카페하우스들은 당시 단골손님들의 흔적을 자랑하고 있다. 유럽의 다른 도시에서 볼 수 없는 이 같은 ‘학제간(interdisciplinary)’ 교류가 빈에서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이와 관련해서, 프랑스나 영국의 부르주아들과 달리 봉건적 귀족정치를 스스로 청산하지 못한 오스트리아 부르주아들의 한계를 지적하는 칼 쇼르스케의 설명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세기말 빈』이라는 책에서 쇼르스케는 19세기 중반의 오스트리아 부르주아는 독자적인 정치·문화적 노선을 개척하지 못하고, 기존의 귀족계급에 동화되려는 모습을 보였다고 비판한다.

1848년, 유럽을 휩쓸었던 자유주의 혁명이 오스트리아에도 밀어닥쳤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혁명 세력은 군주제를 타파하기엔 뒷심이 약했다. 열여덟에 황제가 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군주제와 공화제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제국을 유지해나갔다. 다양한 개혁적인 정책들을 펼쳐 나가던 젊은 황제가 던진 신의 한 수는 ‘링슈트라세(Ringstraße)’의 건설이었다.

그는 1858년부터 빈 외곽의 방어용 성곽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링슈트라세’라는 순환도로를 설치했다. 도로 주변에는 박물관·제국의회의사당·오페라하우스 같은 국가를 대표하는 기념비적 건물들이 한꺼번에 건설되었다. 이후 약 30년에 걸쳐 세워진 링슈트라세 주변의 고딕·르네상스·바로크적 건물들은 나폴레옹 3세의 파리 개조를 능가하는 발전으로 여겨졌다. 황제의 배려에 감동한 오스트리아 부르주아들은 황제를 아버지처럼 여기며 충성을 다짐했다. 정치에 대한 이들의 무관심은 연극과 음악 같은 공연예술에 대한 과도한 관심으로 옮겨갔다. 빈 특유의 심미안은 이렇게 형성되었다.

스스로 만들어내지 못한 합리적 세계에 살면서 화려한 귀족문화를 흉내 내던 이 허약하고 위선적인 오스트리아 자유주의자들의 자녀들이 성인이 되던 1890년대가 되자, 상황은 급속하게 달라졌다. 자녀들은 벼락부자 같은 아버지 세대를 부끄러워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세대가 어설프게 얻어낸 자유주의적, 합리적 가치들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특히 합리성과 이성적 판단에 근거한 아버지의 분류체계에 저항했다. 과학과 예술 그리고 기술이 만나기 시작한 것이다. 산업혁명을 가능케 했던 산업계몽주의의 ‘기술과 과학의 결합’에 드디어 예술이 포함되었다. 이 지식혁명은 바우하우스의 ‘예술과 기술의 통일’을 거쳐 오늘날까지 계속된다.

성적 본능 충실한 ‘심리적 인간’의 출현

경계를 뛰어넘는 다양한 교류는 저항하는 아들들의 특권이었다. ‘융(Jung·젊음)’이라는 단어가 기존 질서의 거부와 혁신의 상징처럼 사용되기 시작했다.. 1891년에는 휴고 폰 호프만슈탈, 아르투어 슈니츨러, 카를 크라우스 등이 주도하는 문학그룹 ‘청년-빈(Jung-Wien)’이 결성되기도 했다.

이 중에서 특히 슈니츨러의 행보가 흥미롭다. 소설가가 되기 전, 그는 당시 유럽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던 빈 의과대학을 다녔다. 이때 함께 공부한 이가 바로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다. 젊은 아들들의 반란에 ‘아들이 어머니를 두고 아버지와 경쟁한다’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프로이트까지 합세한 것이다.

슈니츨러와 프로이트의 이념적 결합은 폭발적 결과로 이어졌다. 아버지 세대가 구축해낸 ‘합리적 인간’과는 정반대의 ‘심리적 인간(homo psychologicus)’을 창조해낸 것이다. ‘심리적 인간’은 성적 본능에 충실한 인간이었다. 이전 역사에서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던 ‘심리적 인간’이 빈의 경계를 뛰어넘는 지식교류를 통해 편집되어 나타난 것이다.

슈니츨러는 프로이트에게서 ‘꿈의 해석’이라는 방법론을, 프로이트는 슈니츨러에게서 ‘자유연상’이라는 방법론을 빌려갔다(톰 크루즈가 주연한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아이즈 와이드 셧’의 원작은 슈니츨러가 1925년 발표한 ‘꿈 이야기’다).

슈니츨러와 프로이트가 창조해낸 이 ‘심리적 인간’을 2차원의 화면에 시각적으로 구현한 사람이 바로 빈 제체시온의 리더 구스타프 클림트다. 아버지 세대가 구조화한 분류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었던 빈 청년들의 오이디푸스적 반란은 ‘심리적 인간’의 구성과 더불어 이 ‘심리적 인간’을 역동적으로 표현하는 빈 제체시온의 종합예술로 이어졌던 것이다.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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