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군가 같은 독일어 가곡은 그만…바그너의 ‘종합예술’ 혁명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696호 18면

바우하우스 이야기 〈40〉

이탈리아 오페라 아리아는 아주 폼난다. ‘벨칸토’니 ‘콜로라투라’니 하는 용어는 화려한 기교를 자랑하는 이탈리아 오페라 가수들의 목소리를 ‘찬양’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어다. 이에 비해 독일가곡 ‘리트(Lied)’의 인기는 상당히 처진다. 대중적 레퍼토리도 기껏해야 슈베르트, 슈만, 그리고 가끔 베토벤 정도다.

화려한 이탈리아 아리아와 달리 #크·트 같은 격음으로 끝나 딱딱 #바그너, 리듬감 있는 음악극 제시 #음악·문학·미술·무용·건축 아울러 #규칙 바꿔 게임 이기려 한 실험 #1902년 ‘베토벤 전시회’ 파격적

리트는 가사를 이해해야 제대로 된 감흥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탈리아 오페라 아리아는 가사를 몰라도 좋다. 멜로디와 가수의 목소리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이다. 물론 피셔 디스카우나 이안 보스트릿지 혹은 페터 슈라이어의 목소리로 듣는 독일 리트도 매우 훌륭하다. 그러나 오페라 아리아의 화려함에 비하면 많이 초라하다. 왜 그럴까?

독일어 때문이다. 독어의 문장은 ‘크’ ‘트’ ‘흐’와 같은 ‘격음’으로 끝날 때가 많다(독일 리트의 격음을 한 번 신경 쓰기 시작하면 노래에 집중하기 참 힘들다. 바흐의 칸타타를 들을 때, 문장 마지막마다 들리는 ‘트’나 ‘흐’를 한 번 신경 써서 들어보시라. 아주 환장한다). 인칭에 따른 혹은 시간에 따른 동사 변화가 ‘t’나 ‘st’로 끝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명사도 침을 튀며 발음해야 할 때가 많다. 조금만 힘주어 발음하면 히틀러식 독어가 되고 만다. 독일어는 예술 가곡보다는 군가에 어울리는 언어다. 딱딱 끊어진다. 그래서 독일 민속 음악을 들으면 대부분 군가처럼 들린다.

독일 노래는 왜 재미없을까

1902년 베토벤 서거 75주년을 기념해 독일 조각가 막스 클링거가 만든 베토벤상. 바그너의 ‘종합예술’ 방식에 따른 ‘베토벤 전시회’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고있다. [사진 윤광준]

1902년 베토벤 서거 75주년을 기념해 독일 조각가 막스 클링거가 만든 베토벤상. 바그너의 ‘종합예술’ 방식에 따른 ‘베토벤 전시회’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고있다. [사진 윤광준]

이탈리아어나 프랑스어는 자음보다는 모음이 발달했다. 레가토 같은 부드러운 성악적 발성이 쉽다. 당연히 다양한 감성을 노래로 표현하기에 이탈리아어나 프랑스어가 독일어보다 훨씬 유리하다.

이 같은 독일어의 약점을 제일 먼저 깨달은 이가 리하르트 바그너다. 독일 오페라가 이탈리아나 프랑스 오페라의 인기를 따라갈 수 없는 이유가 독일어에 있었지만, 바그너는 슬쩍 다른 이유를 들이댄다. 이탈리아나 프랑스 오페라가 성악 위주이기 때문에 극의 진행과는 전혀 관계없는 성악가들의 기교에 의존한다고 비판한 것이다.

당시 오페라의 내용은 누구나 아는 식상한 소재였다. 그러나 극의 진행은 사람들의 관심 밖이었다. 오로지 성악가들의 목소리만이 중요했다. 바그너는 오페라에서 “표현의 수단인 음악이 목적이 되고, 목적이어야 할 드라마가 수단이 되어버렸다”고 한탄했다. 아울러 오페라에서 오케스트라가 성악을 보조하는 역할로 전락해버렸다고 지적했다.

대안으로 바그너는 드라마적 흐름이 중심이 되는 ‘음악극(Musikdrama)’을 제시했다. 바그너는 드라마적 진행에 오케스트라의 역할이 극대화된 사례로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을 꼽았다. 성악과 오케스트라가 주종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조화하며 드라마적 진행을 이끌어낸다는 것이다. 바그너의 음악극에서 의미의 전달수단은 물론 텍스트다. 성악가의 아리아를 전면에 내세우는 선율 중심의 이탈리아 오페라와는 달리 문학과 연극의 산문체 텍스트가 오케스트라와 조화를 이루는 형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연극의 텍스트와 구별되는 음악적 텍스트는 리듬감을 가져야 한다. 이를 위해 바그너는 ‘슈탑라임(stabreim)’으로 이뤄진 텍스트를 사용했다. ‘슈탑라임’이란 ‘두운법’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루스트 운트 라이트(Lust und Leid·기쁨과 슬픔)’, ‘프로 운트 프라이(Froh und Frei·기쁨과 자유)’ 같은 것들이다. 이렇게 두운법으로 문장을 만들면 문장의 악센트가 자연스럽게 리듬감을 만들어낸다. 독일어의 특성상 ‘각운법(Endreim)’, 즉 단어의 끝으로 운을 맞추는 것은 앞서 설명했듯 군가 같은 느낌을 준다. 풍요롭게 감정을 표현하기에는 많이 부족하다.

바그너에게 있어서 ‘음악극’이 추구해야 할 궁극의 차원은 ‘종합예술(Gesamtkunstwerk)’이었다 (이 Gesamtkunstwerk를 그대로 번역하면 ‘종합예술작품’이다. 그러나 의미상 ‘종합예술’ 혹은 ‘총제적 예술’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바그너는 자신의 시대가 처한 상황을 총체적 난국으로 평가하며 예술을 통한 사회변혁을 꿈꿨다. 이때, 바그너가 이야기하는 예술은 제각기 찢어져 서로 관계없이 소모되는 분열의 예술이 아니라, 음악·문학·미술·무용·건축이 총망라된 ‘종합예술’이다.

독일 바이로이트 페스트슈필하우스의 무대. [사진 윤광준]

독일 바이로이트 페스트슈필하우스의 무대. [사진 윤광준]

바그너는 행운아였다. 자신이 꿈꾸던 ‘종합예술’을 ‘바이로이트 페스트슈필하우스(Bayreuther Festspielhaus)’에 구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그너가 직접 설계에 관여한 바이로이트 페스트슈필하우스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아주 익숙한 형태지만, 당시로서는 아주 획기적 건축물이었다. 귀족들을 위한 박스석과 발코니석이 무대 양쪽 2층·3층으로 둥글게 이어지는 19세기 당시의 오페라하우스들과는 달리, 모든 객석이 부채꼴로 펼쳐져 있다. 계단으로 이뤄진 객석은 무대로 집중하는 공간 구조인 덕분에 관객들은 바그너가 의도한 드라마적 진행에 자연스럽게 빠져든다. 오케스트라는 무대 앞쪽 바닥으로 들어가 있어 관객들은 볼 수 없다. 소리로 연기하는 오케스트라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게 설계된 것이다. 이렇게 음악극이 공간 구성까지를 포함하는 ‘종합예술’로 확장되어야 자신이 의도하는 예술을 통한 사회혁명이 완성될 수 있다고 바그너는 생각했다.

바그너의 ‘종합예술’에 대한 집념을 개인적 욕망의 차원에서 해석하면 아주 흥미로운 전략이 드러난다. 권력 구조가 공고한 기존의 체계에서 정점에 오르는 일은 무척 힘든 일이다. 최고가 되려면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내는 편이 쉽다. 그러나 느닷없이 하늘에서 떨어지듯 새롭게 나타나는 것은 없다. 죄다 있던 것들의 ‘새로운’ 편집일 따름이다.

바그너는 기존의 예술분야를 통합하는 자신의 새로운 편집영역을 ‘종합예술’이라 표현했다. 에디톨로지의 관점에서 보자면, 논리적 정당성은 물론 현실적 파괴력까지 갖는 아주 훌륭한 전략이다.

백남준의 이야기대로 ‘게임을 이길 수 없다면 규칙을 바꿔야 한다’. 바그너는 이탈리아나 프랑스 오페라와의 ‘게임’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이자, ‘종합예술’이라는 새로운 ‘규칙’을 들고나온 것이다.

바그너의 음악극은 ‘종합예술’이라는 새로운 규칙으로 성공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바그너 개인의 성공이었을 뿐이다. 이탈리아 오페라에 비해 바그너의 음악은 여전히 재미없다(독일어와 독일 문화에 익숙하지 않다면 바그너 음악은 참으로 많은 인내를 요구한다).

그러나 ‘종합예술’이라는 바그너의 창조적 에디톨로지는 음악보다는 미술 쪽에서 더 강한 파괴력을 갖는 패러다임이 된다. ‘빈의 제체시온’과 ‘칸딘스키의 청기사연감’ 그리고 ‘그로피우스의 바우하우스’가 바로 그것이다.

규칙을 바꿔 게임을 이기려는 바그너의 ‘종합예술’ 전략을 가장 먼저 응용한 이들은 빈의 제체시온이다. 1897년 4월 3일, 젊은 예술가들은 빈의 보수적 예술단체들과의 결별을 선언하며 빈 제체시온을 결성했다. 박람회에서 시작된 분류가 박물관·미술관으로 옮겨오며 예술품의 분류·심사·평가는 일상화되었다. 도대체 예술 작품의 순위를 어떻게 정할 수 있을까?

그러나 분류가 이뤄지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평가는 불가피하다. 문제는 평가 시스템이 제도화되는 순간, 권력화된다는 것이다(예전에 ‘국전’을 둘러싼 논란들을 기억해보라). 제체시온은 당시 예술아카데미-박물관-미술상이 독점한 심사-평가-분류의 카르텔에 대한 과감한 도전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게임의 규칙’을 만드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종합예술’ 미술서 더 강한 파괴력

클림트와 더불어 빈 제체시온을 이끌던 요제프 호프만(Josef Hoffmann·1870~1956)은 그 새로운 규칙을 바그너의 ‘종합예술’에서 찾아냈다. 그 실험적 시도가 바로 1902년에 열린 14회 제체시온 전시회다. 호프만은 독일의 조각가 막스 클링거(Max Klinger·1857~1920)와 함께 베토벤 서거 75주년을 기념하며 ‘베토벤 오마주’를 기획했다. 그리고 이 전시회에 바그너의 ‘종합예술’ 개념을 끌어들였다. 바그너가 그토록 찬양했던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주제로 음악·미술·조각을 포괄하는 ‘종합예술’을 실험했던 것이다.

일명 ‘베토벤 전시회(Beethoven Ausstellung)’는 파격적이었다. 전시장의 벽을 그림으로 가득 채워 전시하는 방식을 탈피한 새로운 공간실험이 행해졌다(벽 전체를 그림으로 채우는 방식을 ‘살롱걸기’라 부른다. 소통보다는 관람자를 압도하려는 전시방식이다). 전시회 장소는 빈 제체시온 참여 예술가들이 주축이 되어 새로 건축한 황금색 돔의 건물이었다. 전시회의 목표는 ‘건축·회화·조각의 상호작용’이었다.

그리스비극을 모범으로 삼았던 바그너의 ‘종합예술’ 구상에 따라 전시장은 그리스 신전과 같은 ‘예술의 신전(Tempelkunst)’으로 만들어졌다. 이 신전에 모셔야 할 예술의 신은 베토벤이었다. 회화·판화·조각에 능통한 독일의 ‘종합예술가’ 클링거가 제작한 베토벤상은 대리석·청동과 같은 다양한 재료로 수년에 걸쳐 제작되었다. 공간 편집을 통해 구현되는 조각의 중요성을 설파해왔던 클링거의 평소 주장대로 제체시온의 전시실이 구성되었다. 베토벤상은 제체시온 전시관 중앙전시실에 ‘모셔졌다’. 좌우 양쪽의 전시실에는 ‘예술의 신’ 베토벤을 참배하기 위한 순례의 길이 마련되었다. 바로 이 순례의 길 한쪽 공간에 그 유명한 클림트의 ‘베토벤프리즈(Beethovenfries)’가 있었다.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