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시론

코로나 시대 의료행정 ‘존엄한 웰다잉’ 살펴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9면

최철주 칼럼니스트·웰다잉 강사

최철주 칼럼니스트·웰다잉 강사

수도권 광역버스 안에 다닥다닥 붙은 공익광고가 필자의 눈길을 끌었다. 큼직한 글자로 ‘이제 연명 의료도 현명하게 선택하는 시대’라고 강조하는 문구였다. 똑같은 광고가 주기적으로 버스 내부를 빙 둘러서 나붙어 있는 장면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품위 있고 존엄하게 생을 마감하는 웰다잉(Well-dying)을 생각해보자는 취지다.

코로나19로 비인간적 죽음 많아 #마지막 삶 챙겨주는 따뜻함 절실

코로나19 사태가 크게 확산한 지난 4월 말이었다. 서울 강남역과 수원 광교역을 왕복 운행하는 신분당선 전철 6량 전체 내부는 연명 의료 광고로 채워져 있었다. 필자는 정초에도 ‘웰다잉 홍보 열차’를 타고 서울 근교를 자주 오갔다.

전염병이 번지며 죽음의 공포가 우리 옆을 파고드는 시점에 연명 의료 결정법(일명 웰다잉법) 시행 사실을 홍보 중이라 이상하게 비칠 수도 있다. 보건복지부나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일부러 홍보 타이밍을 맞춘 것은 아닐 것이다. 의례적인 연중행사의 하나로 웰다잉 공익광고가 곳곳에 나붙은 것으로 짐작한다.

이 제도의 핵심은 누구나 삶의 마지막 시기를 소중하고 편안하게 맞이할 수 있도록 국가가 도와주는 데 있다. 그 공익광고는 우리가 갈구해온 인간의 존엄을 최고의 가치로 삼았다.

지난 5개월간 급박하게 돌아가던 의료 현장에서 이 광고는 어떤 메시지를 남겼을까. 정부가 환자의 존엄 지키기에 앞장서겠다던 약속은 전쟁 상황 같은 코로나19 현장에서도 나름의 마땅한 절차를 거쳤는지 매우 궁금하다.

코로나 시대에 죽음은 아주 느린 발걸음으로 찾아왔다. 눈 깜짝할 사이에 특정 병동이나 요양시설을 덮쳤다. 대구의 한 의사가 중증환자에게 “마지막을 잘 생각하셔야 한다”고 귀띔했다. 물컹함이 강하게 느껴진 말이다. 인간 냄새가 짙다. 참 좋은 의사 옆에서 그는 떠났다.

다른 많은 환자는 어떻게 숨을 거뒀을까. 온통 뒤죽박죽된 병실에서 가족과 단절된 채 유언도 남기지 못한 환자들의 슬픈 이야기가 지금도 떠돌고 있다.

전염병 시대라 해서 우리의 죽음도 비인간적일 수 있다는 지레짐작은 당치 않는 일이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들의 눈물 속에 편안하게 숨을 거둔다는 일반적인 존엄의 형태를 코로나19 시대에는 온전히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나 최소한의 품격을 갖춰 주려는 의료 행정을 펴야 한다. 무의식 상태에 빠진 환자의 최후는 어떠했는지, 사전연명 의료의향서나 연명 의료계획서가 제대로 처리됐는지, 그게 어려웠다면 어떤 대안이 강구됐는지를 알고 싶다.

정부가 저렇듯 홍보해 온 ‘연명 의료도 선택하는 시대’가 겉치레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지 않으려면 우리의 마지막 삶을 보살펴주려는 따뜻함이 어딘가에 스며들어야 한다. 이 제도의 취지에 무관심한 의료진도 있다. 긴박한 상황에서도 제대로 된 절차를 밟는 노력이 진짜 국민을 위한 의료다.

영국의사협회나 일본의사회는 고령 환자들에게 “중증환자라면 어느 상태에서 치료를 포기할 것인지 미리 생각해둬야 한다”고 사전에 고지했다. 관련법이나 정부 가이드라인에 따라 존엄한 죽음을 선택할 기회가 있음을 알렸다.

주요 선진국의 요양병원에서 수많은 노인 환자들이 연이어 숨지면서 유가족에게 극심한 고통을 안겼다. 한국사회도 예외가 아니어서 마음이 피폐해진 사람들이 허다하다.

감염 고위험 시설로 꼽히는 요양시설의 환자나 가족들의 불안을 지나칠 수는 없다. 고통을 동반한 죽음은 약하디약한 고리를 더욱 파고들 것이다.  2차, 3차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이 예고됐다.

고령자만 죽음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생사를 같이하고 있다. 인간의 존엄은 결코 정부나 정치인이 주는 시혜가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존엄은 스스로 찾는 것이다. 웰다잉이 더 소중한 이유다. 내 삶을 다져가야 하기 때문이다.

최철주 칼럼니스트·웰다잉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