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쟁이가 멋대로 쓰고 그렸다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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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대가 면앙정 송순의 시를 쓰고 그린 구중서씨의 ‘소쇄정’. “조그만 누각이 영롱히 솟아 있어 앉아 보니 머물고 싶은 마음 일어난다”는 글을 담았다.

"불우국 비시야(不憂國 非詩也)라.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이 없으면 시가 아니다. 구중서 선생이 즐겨 쓰는 다산 정약용의 글이지요. 출판사인 창작과비평사 벽에 한 폭,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실에 또 한 점 붙어 있는데 볼수록 좋아요."

전시장을 둘러보던 이시영 시인은 "언제 그림까지 그리셨나"며 구중서(70.사진)씨 옆구리를 찔렀다. 서울 인사동 공화랑에서 열리는 문학평론가 구중서씨의 '너른뫼 서화전'은 문학과 미술동네가 맞들어 만들었다. '너른뫼'는 구중서씨의 호 '광산(廣山)'의 우리말 풀이. 화가 주재환씨가 "형님, 한자보다 우리말이 좋잖아요" 해서 붙였다. 두루 발이 넓은 구씨의 마음 씀씀이에도 딱 맞아떨어진다.

구중서씨의 글씨 내림은 '거리의 철학자'라 불리던 민병산(1928~88)으로 거슬러오른다. 신경림 시인의 시에 나오듯 "허름한 배낭 어깨에 걸고…자유롭고 거침없이 세상을 살다 간" 민병산은 자유자재로 거침없이 휘갈겨 쓴 삐뚤삐뚤한 '민병산체'로 많은 이의 사랑을 받았다. 부스럭거리며 가방 속에서 꺼내 나눠주던 민병산의 붓글씨 보시를 이제 구중서씨가 이어받았다. 거창한 배움 없이 좋은 생각과 마음을 널리 함께 읽고 나누자는 뜻을 담았다.

"민병산 선생과 명동 10년, 관철동 10년, 인사동 수십 년 시절을 보내면서 이른바 '민체(民體)'의 아름다움을 알았어요. 관념으로 쓴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건져 올린 정신의 고갱이지요. 후배나 젊은이에게 전하고 싶은 한민족 마음의 고향을 글씨와 그림으로 풀었습니다."

구씨의 글씨는 둥글고 순하다. 잘 쓰겠다고 애쓴 흔적이 없다. 그림은 원만하고 어질다. "멋대로 쓰고 그렸다"는 구중서씨 표현은 그가 즐겨 적는 다음 한마디에 맺힌다. "수급불류월(水急不流月), 여울을 급히 흐르는 물도 물 위에 뜬 달을 떠내려 보내지는 못한다."

그동안 묻혀 있던 만해 한용운의 선시(禪詩) 몇 수도 그의 글씨를 타고 세상으로 날아온다. "공중무로 조하거(空中無路 鳥何去), 공중에는 길이 없는데 새는 어디로 날아가는가."

이 전시는 구씨가 최근 펴낸 '면앙정에 올라서서'(책만드는집)와 '문학적 현실의 전개'(창작과비평사) 출판기념회를 겸한다. 그는 두 책을 내며 "'지속가능한 발전'이란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지속가능한 문학'이 요청된다. 인간다운, 너무나 인간다운 삶의 현실이 바로 지속가능한 문학의 터전"이라고 썼다. 그의 글씨와 그림은 '지속가능한 미술'이 무엇인가를 제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전시는 2~8일. 02-735-9938.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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