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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선수 죽음 부른 체육계 인권침해, 이번엔 뿌리뽑아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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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언제까지 이런 비극을 봐야 하는가. 트라이애슬론(철인 3종) 국가대표를 지낸 최숙현 선수가 감독·트레이너 등의 가혹행위를 견디다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면서 체육계의 고질적인 인권침해가 또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1년 전 심석희 쇼트트랙 선수의 ‘미투 폭로’ 등으로 지도자에 의한 선수 (성)폭행, 성적 만능주의에 따른 체벌의 일상화 등 폭력적인 문화를 바로잡자는 목소리가 높았음에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과연 체육계의 자정 의지가 있는지도 의문이다. 당시 문화체육관광부와 국회 등은 앞다퉈 반인권적 체육문화 개선을 약속했지만 말만 요란했기에 국민의 공분이 더욱 커지고 있다.

1년 전 ‘체육계 미투’에도 말뿐인 정부 대책 #성적 만능, 봐주기, 폭력문화 용인 더는 곤란

최숙현 선수는 소속 경주시청팀 감독과 ‘팀 닥터’로 불린 운동처방사 등에게 숱한 폭행, 폭언을 당했다. 수차례 관계기관에 SOS를 쳤지만 소용없었다. 지난 2월부터 체육계 상급 기관인 대한철인3종협회, 대한체육회 스포츠인권센터는 물론이고 경주시청, 경주경찰서 등에 피해 신고를 했지만 적극적인 조치를 한 곳이 없었다. 최 선수는 극단적 선택을 하기 하루 전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넣고, “그 사람들 죄를 밝혀 줘”라는 문자메시지를 남겼다.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 여자 컬링 은메달을 딴 ‘팀킴’ 멤버들은 그해 11월 “지도자들에게 폭언을 당하고 상금도 못 받았다”고 폭로했다. 지난해 1월엔 쇼트트랙 여자 국가대표였던 심석희, 여자 유도선수 출신 신유용이 코치로부터 상습 성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당시 정부는 비리 근절과 대책 마련을 약속했다. 문체부는 스포츠혁신위원회를 출범시키고 폭력사건이 자주 발생하는 합숙소 폐지 등의 학교 스포츠 정상화 방안을 발표했다. 이때 엘리트 체육 시스템 약화를 우려하며 이를 가장 강하게 반대했던 곳이 대한체육회다. 대한체육회가 과연 인권침해 근절 의지가 있는지 의심스러운 대목이다. 심석희 미투 가해자를 옹호하는 듯한 발언으로 사퇴 요구를 받았던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은 정관을 고쳐 연임에 성공했다.

체육계의 고질적 폭력문화·인권침해는 체벌을 통해서라도 성적만 좋으면 된다는 성적 만능주의, 인맥과 학연으로 똘똘 뭉쳐 서로 봐주는 문화 등이 작용한 결과다. 비리 고발이 있어도 가해자들이 별 처벌 없이 복귀하는 악순환도 잦다. 이번 사건 이후 경주시청팀 내 다른 선수 피해자들의 증언이 나오고 있다. 한 치의 의혹도 없이 전모를 밝히고 엄벌에 처해야 한다. 보다 근본적이고 실효성 있는 재발 방지 대책도 시급하다. 새롭게 시행되는 ‘운동선수보호법’이 지도자 아닌 팀 닥터 같은 관계자는 법적 근거가 없어 가혹행위 근절이 어렵다는 지적이 있다. 이번에도 정치권은 일제히 재발 방지를 외치고 있다. ‘죽음밖에는 답이 없다’고 여겼을 최 선수의 희생이 헛되지 않아야 한다.